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단양 적성
단양 적성

고구려 테메식 산성 ‘적성’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보면 ‘적산현 본 고구려현 경덕왕인지 금단산현(赤山縣 本高句 麗縣 景德王因之 今丹山縣)’이라 나오고 <신증 동국여지승람 단양군의 건치 연혁조>를 보면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인데 혹은 적성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내제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本高句麗赤山縣一云 赤城 新羅時 爲奈 堤郡領縣云云)’고 나와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죽령현 본고구려 죽현현 경덕왕 개명 금 미상(竹嶺縣 本高句麗縣 景德王 改名 今 未詳)’이라 나와 죽령에도 고구려현을 두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죽령현의 소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적성에 대한 <여지승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둘레가 1768척이고 안에는 큰 우물 1개소가 있는데 지금은 폐해졌다’고 기록되었다. <조선고적조사자료(朝鮮古蹟調査資料)>에는 주민들이 민보성(民堡城), 농성(農城)이라 불렀다고 전한다고 돼있다.

적성 조사 보고서를 보면 ‘적성은 해발 323.7m 되는 성재의 정상부를 에워싼 마안형(馬鞍形)에 가까운 테메식 산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벽 길이는 922m로 크지 않으며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으나 부분적으로 축성수법을 살필 수 있는 곳이 남아 있다. 전체 성벽은 기초부를 토석(土石)으로 다진 후 외벽을 정연히 석축했다. 내측에는 잡석과 흙을 채운 다음, 어느 정도 높이에서 내외벽을 모두 석축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축성에 이용된 돌은 주변에서 많이 찾을 수 있는 석회암과 화강암이다. 성벽 가운데 비교적 보존이 잘된 곳은 북동벽이다. 높이는 바깥높이(外高) 4m, 안쪽높이(內高) 3m 정도이며, 서벽은 성벽의 폭이 6.4m나 된다. 석축은 현재 12~13단의 층급에 높이 2.3m를 나타내고 있다. 남서벽은 3단의 석축 위에 체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체성의 폭은 6.3m이고 성벽의 높이는 4m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 하부에서 확 인된 보축시설은 1.3~1.4m의 높이로 2단으로 구축되었는데 각 단마다 성석을 7~9켜씩 축조하였다. 따라서 기단보축부를 포함한 성벽의 높이는 6.5m 이상으로 산출된다. 성문지(城門址)는 3개소가 있으나 모두 무너져서 그 크기나 형태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우물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건물지 또한 뚜렷하게 확인되는 곳은 없다’고 되어 있다.

6월 초 30도를 넘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글마루 취재반은 적성을 답사했다. 해가 구름 속에 숨었어도 땀이 온몸을 다 적신다. 한눈에 수몰된 단양 구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적성은 많이 보수되었으며 일부 구간은 장대하게 보축했다.

답사하는 과정에서 적성비 부근 공터에서 고구려 적색 기와가 수집되었다. 신라 기와토기들도 산견된다. 과거에는 이 기와들이 화적을 맞은 신라기와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데 기와들은 대부분 평와들이다.

죽령 경계석
죽령 경계석

죽령고개 호국유적 보국사 터의 비밀

보국사(輔國寺) 터라고 불린다. 이 절터는 죽령 고갯마루에 있다. 마을 이름은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다. 필자는 40여 년 전에 이 절터를 조사한 바 있다. 당시 이 절터에 있던 석조 장륙불(丈六佛)은 쓰러져 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세워져 있다. 4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조각 수법이 예사스럽지 않다.

일반적으로 장육상이란 사람 키 크기인 8척의 배수, 즉 16척의 불상을 지칭한다. 기록에 보이는 신라 삼보(三寶) 가운데 하나였던 경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 석불은 목이 잘려 나갔다. 얼굴이 없어 상호를 알 수 없다. 가슴의 무늬도 마모가 되어 파악할 수 없다. 옷의 문양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두드러지며 양쪽 무릎까지 U자형으로 층단을 이루고 있다. 끝부분에서 뾰족하게 마무리되었는데 이는 북위(北魏) 석불에도 나타나는 양식으로 통일신라 금동불상의 양식에도 계승되고 있다. 이 같은 형태의 금동여래상을 최근 조사한 적이 있는데 통불주조(通佛鑄造) 방식으로 장육상의 모습을 닮고 있다. 이 금동불도 삼국시대 신라 불상으로 해석된다.

보국사 터에서는 장육불 조성시의 부재인 석조 유물들이 산견된다. 불상 주변으로 원형 돌기둥, 죽절문양 돌기둥, 연화문 좌대 기둥머리 돌(柱頭石), 옥개형(屋蓋形) 석재 등이 산재해있다. 보국사를 석굴사원의 유형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불상을 조성할 당시 보호각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되며 주변에서는 많은 와 편이 산란하고 있다.

혹 고구려 적색 기와조각은 없는 것일까. 취재반은 열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글마루 취재반은 기와 더미 속에서 사격자문이 선명한 고구려 와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사찰의 초축은 고구려 영역이던 5세기 후반이며 신라가 뺏은 후에는 대대적 신라가람으로 조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거대한 장륙상을 세워 다시는 고구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신라인의 염원을 이 불상은 말해주는 것인가.

보국사지에 있는 석조여래입상
보국사지에 있는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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