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에서 탄생으로 한 시대의 기준이 된 예수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시작부터 그 부패함을 드러내며 걸어온 세월이 어느덧 2000년이 넘었다. 그간 기득권, 기성, 주류 등 다양한 수식어와 함께 불려진 기독교는 돈‧권력‧성‧정치 등 세상적인 이권과 야합하며 본질을 잃고 분열하며 신뢰를 잃어갔다.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하늘에 닿았다. 어두운 시대 속, 새 시대 새 종교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절규에 대한 답이 무엇일까. 본지가 예수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역사를 통해 살펴봤다.

로마 서커스에서 기독교인을 사자밥으로 던져주는 등 박해를 그린 그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로마 서커스에서 기독교인을 사자밥으로 던져주는 등 박해를 그린 그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예수 십자가‧부활‧승천 후

12제자‧순교자 피로 토대

 

핍박 속 목숨 건 복음 전파

‘밀라노 칙령’으로 인정받아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교회의 부패상이 드러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초대교회의 신앙을 찾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10여년 전 한국교회는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리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걸고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읊으며 초대교회에서 전승된 것으로 알려진 예전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부패상이 드러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초대교회’를 찾았다. 초대교회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신학자들은 초대교회를 주제로한 책을 저술해냈다.

초대교회사의 연대 구분은 외형적인 기간을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점으로 AD 476년 서로마의 멸망까지이며, 내면적인 교회 역사 중심으로 할 때는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 신약이 기록됐고, 교회의 신학과 체제가 확립됐다.

◆12제자로 시작된 초대교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현 기독교의 부패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며 언급하는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와 바울 등으로 이어진 신약성서 내용을 차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가리킨다.

예수의 십자가 짐과 부활 승천 사실을 증거했던 초대교회는 팔레스타인을 넘어 소아시아 지방으로 확장됐다. 복음을 전파하며 그들의 활동을 알려주고 있는 책이 신약 사도행전이다. 소아시아 지역의 복음 전파는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이뤄졌다. 사도행전에는 특히 바울의 전파 내용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거주지역을 넘어 헬라문화권까지 복음을 전파했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또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등 각 지역에 보낸 서신서들은 로마서 이후 등장하는 고린도전서부터 유다서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들을 통해 기자들은 각 교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논란과 문제들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을 전해줬다. 그리고 다시 올 것을 알리고 떠나간 예수의 예언을 가르쳐 이뤄질 때 믿게 하는 믿음의 신앙을 갖도록 해줬다.

◆핍박과 박해 속 순교의 씨

처음 30년 동안 로마당국은 기독교를 당시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던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종교로 생각했다. 유대인 중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심지어는 로마당국을 부추겨 기독교를 박해하게 하려고 애썼다.

또한 기독교는 다신교를 받아들였던 로마의 종교적 관습과 정면으로 배치, 결국 로마가 기독교를 향해 박해의 포문을 열도록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노동자들이 살고 있던 로마의 한 주거지역에서 대화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네로황제는 이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돌리며 많은 기독교인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로마의 제1차 박해는 화재 직후 시작해 네로가 사망했던 68년까지 지속됐다.

네로황제 사망 후에도 박해는 250년간 지속됐으며, 2세기경 기독교 저술가였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순교의 피가 곧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역사적인 도시인 시라쿠사에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때 세워진 카타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역사적인 도시인 시라쿠사에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때 세워진 카타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심지어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세금 수입이 부족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은을 빼앗기도 했다. 이에 유대인의 저항이 거세졌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로마는 AD 66년에 예루살렘에 군대를 보내 주민들을 학살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한 예루살렘 성전 공격은 계속 됐다. 유대인들은 낮에는 온종일 로마 군대의 공격을 방어했고, 밤에는 무너진 성벽을 보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은 불에 타고 말았다.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유대인들은 학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유대 민족과 성전은 솔로몬 이후 다시 한 번 파괴당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헤롯 성전은 파괴됐고, 오늘날 그 자리에는 통곡의 벽만이 남아있다.

◆ 2세기 변증가들의 예리한 ‘전도’

1세기에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은 2세기를 맞으며 좀 더 성숙해지고, 예리해졌다. 특히 기독교 전도를 위한 ‘변증가들’의 등장으로 변화를 맞는다. 이 변증가들은 당대 이단들과 정부 지도자 및 지식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변호했다. 이들은 기독교가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 윤리적이며, 어떤 철학보다 가장 훌륭한 진정한 철학이라고 강조하며 기독교를 설파하고 관련 글을 저술했다. 이들은 주로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동시에 공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저스틴 마터다. 그는 예수로 인해 등장한 그리스도교가 구약 성경에서 예언했던 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실체라고 강조했다. 후대 교부들은 이 변증가들의 주장을 기독교의 핵심 진리로 체계화한 것으로 전승된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로 인정

‘관용의 칙령’으로 특징되는 ‘밀라노 칙령’이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사이에서 정치조약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동방교회는 313년 6월 리키니우스에 의해 선포된 이 포고령에서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그리스도교도에게 법적 권리(교회를 조직할 권리도 포함)를 보장해주며, 몰수한 재산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신속히 돌려주도록 지시했다. 이전에 내렸던 여러 칙령들은 단명했으나, 이 밀라노 칙령은 종교관용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당대 그리스도교를 분열케 했던 성직자 아리우스의 견해를 단죄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며 성자인 예수는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했다. 주교들은 아리우스를 이단시 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신조를 만들었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불리게 됐다.

니케아 신조는 가톨릭 주교들의 견해를 담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니케아 신조 신앙고백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개신교 교단들이 대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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