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1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전문학교관제(專門學校官制)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이하 ‘경의전(京醫專)’) 규정이 반포되어 경의전이 문을 열었다.

입학자격은 한국인은 16세 이상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일본인은 17세 이상의 중학교 졸업자였다.

수업 연한은 4년이었으며, 기초강의는 주로 1,2학년 과목으로 임상강의는 3,4학년 과목으로 편성되었는데 교수진은 빈약하였으니 구체적으로 교장 외에 교수 3명과 조교수 1명이 모든 학과를 전담하였다.

한편 경의전 교사(校舍)는 당시 서울 이화동 네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건물이 매우 좁고 시설도 초라하였으나, 해마다 증축공사를 꾸준히 한 결과 1922년에 의학교육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대부분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한가지 부족한 측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부속병원(附屬病院)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 경의전은 총독부의원(總督府醫院)과는 완전히 별개의 기관이었으나 별도의 독립적인 병원이 없는 상황에서 총독부의원이 부속병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관련해 임상실습은 물론 임상강의도 총독부의원에서 받았으며, 경의전의 교장 역시 총독부의원 원장이 겸직하는 관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교수진 또한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경의전 학생들은 김형기, 한위건, 김탁원, 백인제, 길영희, 나창원, 이의경(이미륵) 등이 중심이 되어 많은 학생들이 3.1운동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중에서 32명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3.1운동 시위에 이어서 1921년에는 일본의 해부학 교수 구보타 케시가 두개골 하나가 없어진 것을 두고 한국인 학생들을 의심하여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동맹휴업으로 까지 확대되었으며, 결국 주동자 9명이 퇴학, 185명이 무기정학 당하는 등 그 파문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더욱 더 강력한 저항운동(抵抗運動)을 전개한 결과 결국 학교는 해당 학생들의 징계를 철회하고 해당 교수는 사임함으로써 사건은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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