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

‘나는’ 본래부터 교직에 뜻을 두어 사범계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다른 분야에 목적을 두고 일반대학에 진학했던 사람으로 본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분야의 공직에서 근무하다가 본래의 희망과는 거리가 먼 교육계에 들어왔으니 모든 것이 미숙한 상태에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당시는 교직에 이직이 많고 자원은(교원) 적어서 교육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던 시기이니 우리 같은 일반대학을 나온 사람도 단기 교육을 시켜서 일선에 배치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공주교대 초등교원 양성소 4개월 과정을 이수한 다음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곳이 충남에서도 가장 오지로 치는 당진군 순성면의 북창국민학교였으며, 때는 바로 방학을 며칠 앞둔 12월 16일이었다. 처음 부임을 하니 교사가 결원이어서 비어 있던 2학년 1반 담임을 주었다. 한편 염려도 되고 기쁘기도 한 심정으로 내가 맡은 반에 들어가서 인사를 한 것이 교직에 첫발을 내디는 순간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의 경제가 발전되지 못한 어려운 시기라 대개의 경우 옷이 남루하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학생들 거의 전부가 꺼칠해 보였으니 농촌의 생활정도가 피부로 느껴져 가슴이 아팠고 불쌍하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이 불쌍한 아이들이 오늘부터 나와 함께 닥친 운명을 개척해야 할 아이들이 아닌가? 내가 이끌어주어야 할 아이들이 아닌가! 이 아이들의 장래는 이 순간부터 나의 성의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구나 하는 책임감이 앞섰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참고교재도 없고 요령도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인지 도저히 방향이 서지 않았고 속수무책이었다.

교사라는 직책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갈수록 더욱 부담만 느끼게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이 교직에 섰다가는 선량한 학생 다 버리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고 당장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 차례 되풀이되곤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며칠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차츰 요령이 터득됐고 사직을 하지 않는 이상은 세월만 보낼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라는 양심의 소리가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른 교사들도 처음에는 다 나와 같은 처지에서 출발해서 다들 잘하고 있는데 나라고 못하랴 너도 해 보아라.’하는 마음의 격려를 받으면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다행히 그때 내가 부임한 날짜가 68년 12월 16일이었고 방학은 12월 25일이어서 8일만 근무하면 방학이었다. 방학 후에는 그간에 요령도 생기고 향상된 데다가 참고서적도 구하여 다음 준비를 했기 때문에 처음처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2월 1일 개학을 했고 또 학년말 휴가가 있었고 20여일을 근무하니 학년이 바뀌게 되었다. 학년이 바뀔 때는 아직 미숙하다 싶어 교장선생님께 말씀을 드려 가장 지도하기 쉽다고 생각되는 3학년을 지도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시고 3학년 1반을 배당해 주셨다.

3학년 1반을 맡고 나니 같은 학년을 맡게 된 다른 교사가 작년에 그 반은 그냥 놀려서 형편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모 교사가 중등 준교사 자격 시험을 준비하느라고 순전히 자습만 시켰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모 교사는 농업과 준교사에 합격하여 경기도 내의 모 농업고등학교로 부임해 갔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정확히 기억은 못하나 40세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많은 연령으로 합격을 했으니 피나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본인으로서는 대단히 잘한 일이요 축하를 받을 일이었으나 자기 자신만의 영광만을 위해 공인의 입장을 버렸다면 이는 규탄을 받아야 마땅하리라 생각됐다.

여하튼 3학년 1반을 맡아서 지도해 보니 기가 막혔다. 책읽기를 시켜보니 반수 이상이 읽기 능력이 부족하고 1/3이상인 24명은 아주 캄캄한 문맹이었다. 교사 초년병에게 어떻게 이런 반을 배당했나 원망도 해보았지만 도리 없는 일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이 철없는 아이들을 일깨워 키우는 것이 사명일진대 책임을 지고 해내야 할 교사가 어쨌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불쌍한 내어버린 아이들을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돌볼 것인가. 나는 이 아이들을 위해서 이 학교에 보내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방과후도 쉬지 않고 지진아를 지도했다. 대상 학생이 문맹이니 수업과정이 문맹퇴치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쓰게 하고 읽게 하고 5개월을 계속 지도하니 성과가 나타났다. 즉 읽기에 능한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학생은 더 지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제외시키고 나머지 학생들을 데리고 계속 지도하니 학년말에는 완전히 모든 학생들이 읽기에 능해져 계속할 필요가 없어 중단했다.

지금은 교육청에서 더 나아가 교육부에서도 지진아 지도에 관심을 갖고 행정적으로 권장을 하여 지도가 되는 처지이지만 그 때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으니 누구 보라고 한 일도 아니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한 일도 아니었다. 하나 둘 책을 못 읽는 학생이 구제되니 그것이 기쁨이었고 교사로서의 보람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 혼자 스스로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은 장학지도를 나왔던 장학사를 통해서 우수사례로 인정되어 전 군에 보급 실시되게 하였고 결국 더 나아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이것이 지진아 지도의 선구가 되었으니 더욱 보람있는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느 날인가 근무를 마치고 퇴근을 하니 우리 집 내자가 약주 한 병과 감주 한 주전자를 내놓으며 한 학부형이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석영 군의 학부모였는데 모월 모일 타작을 하는 날이니 내외분이 꼭 오셔서 점심을 잡수시고 가라는 초청을 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외아들인 석영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 줄곧 공부를 못해 속이 상했는데 몇 년 만에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교직생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초대한 날이 되어 그 집에 가 보았다. 그 바쁜 중에도 고맙다는 치하를 거듭하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해 주었다.

물론 성심껏 차려준 점심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귀가했다. 그 후로는 성심 성의껏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이름을 얻었고 역시 그 학생은 커서 사회의 중견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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