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포천 반월성에서 발견한 고구려 토기
포천 반월성에서 발견한 고구려 토기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와 강력함을 자랑했던 고구려.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한다. 주몽은 성은 고씨(高氏)이며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본기>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본래 백두산(압록강) 근처에 살던 부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유화는 이 부족을 이끌던 여촌장이었으며 부여 금와왕의 세력이 침공하자 주몽을 임신한 상태에서 인질이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주몽을 금와왕 아들들의 위해(危害)에 대비, 남쪽으로 피신시킨 데서 알 수 있다.

주몽은 졸본(卒本)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기원전 37년 비류수(沸流水) 위에 궁전을 신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다. 주몽은 기원전 36년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기원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이어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병합했다.

부여국을 탈출한 주몽이 갑자기 급속히 강대해진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그것은 압록강 유역에 분포돼 있던 여러 부족과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니고 있던 말갈을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천변이나 들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말갈족은 말을 잘 타며 용맹스러웠다. 주몽은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철기를 구입, 무장시킨 것 이다. 중국기록에 말갈을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고 한 것은 같은 부류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초 수천 명이었던 고구려 기병이 1만~3만 명으로 늘어난 것은 이에 합류한 말갈족들이 늘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말갈은 고구려를 부모의 나라 혹은 형제국으로 생각하여 멸망 때까지 충성스러움과 군사적 응원을 다했다. 말갈의 후손들인 여진은 만주지역에 혼거하면서 고려 후기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 왔다. 그리고 개경을 찾아가 신민으로 삼아줄 것을 간청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광개토대왕 시기 군사력은 기병만 5만 명에 이르렀다. 대왕은 서쪽으로 후연을 제압하여 요동을 장악했고, 동부여를 정복하여 남만주 일대를 차지하였다. 파죽지세로 백제와 신라를 공벌하여 제후국으로 삼은 것이며 후에 문자왕의 중원 고구려비로 남게 된 것이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중부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숙원관계인 백제가 북위(北魏)에 상응하여 모함하고 조롱하자 직접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남하, 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한다. 한성공격이 용이했던 것은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포천, 마홀 행로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군은 평소 전방에 말갈군을 앞세워 전쟁했다. 지배민족은 항상 피지배민족을 앞세워 다른 국가의 군사력을 공격했다. 신라가 용감한 망명 가야 군사력을 앞세워 한강변을 공략한 것과 비슷하다. 말갈은 어떤 부족이었을까. <수서(隋書)>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라는 7부의 말갈이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라 그들의 주거 범위를 짐작해 보면, 속말부는 쑹화강(松花江) 상류지역, 백돌부는 지린성(吉林省) 부여현(扶餘縣) 일대, 안거골부는 아십하(阿什河) 유역, 불녈부는 무단강(牡丹江) 유역과 닝안현(寧安縣) 일대, 호실부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이란현(依蘭縣)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여진이라고도 불렸으며 후에 금나라를 세워 명나라를 정복하여 청(淸)을 세웠다. ‘淸’이라는 한자의 음독은 ‘맑을 청’이다. 말갈을 ‘ᄆᆞᆰ다’는 뜻의 ‘淸’자를 차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말갈의 후손들인 금국이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 셈이다. 포천을 점령, 상주한 고구려군사의 주력은 말갈 군사력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들이 이곳의 주인이 되었으며 장수왕대는 백제 위례성을 공격하는 전위가 됐을지도 모른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포천 반월성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포천 반월성

완연한 고구려식 성지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에는 ‘고성 반월산 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37자(尺), 가운데에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지금은 폐(廢)하여졌으나 수축(修築)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각종 <지지(地誌)>에는 고성(古城), 산성(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반월성은 고구려 마홀로 바뀌기 전 혹 백제에서 붙인 이름인가. 성의 구조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전체 길이는 1080m나 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성곽이다. 자연 지세를 이용하였으며 정상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넓은 공터가 있고 위쪽에는 약 661㎡(200여 평)의 분지(盆地)가 있다. 그런데 완연한 것은 백제의 초축(판축성) 위에 완전 고구려식의 석성을 구축한 사례이다. 백제시기 추축한 형태는 성의 남쪽 부분에 완전하게 남아있다. 작은 할석을 흙과 섞어 단단하게 다진 것으로 서문지 치성과 연결시켰다. 이 판축의 유구는 청성역사공원에서 올라가는 둘레길 일부에서도 확인된다. 완전한 백제식 성의 구조다.

지난 1995년 발굴조사 때 문지 2개소, 치성 4개소, 건물지 6개소, 우물지, 수구지, 장대지, 망대지 2개소가 확인됐다. 발굴조사 당시 수습된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고 적힌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현재 포천시 문화원에 전시되고 있다. 정서(正書)로 고졸한 해서체로 찍은 기와는 회흑색이다. 이 명문으로 이 성의 주인이 고구려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성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성곽구조인 ‘치성(雉城)’이다. 꿩이 몸을 웅크리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치성’이라고 불리며 고구려성지에서 많이 확인되는 형태다. 작은 규모의 오녀산성을 보는 기분이다. 치성의 밑돌들은 장방형으로 흡사 옥수수알갱이처럼 치석한 것으로 왕도인 지안 국내성처럼 들여쌓기로 축성했다. 조사보고서를 보면 치성은 남치성, 서치성, 북서치성, 동치성 등 모두 네 곳이 확인되었다고 되어 있다. 남치성은 남벽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규모는 길이 13.9m, 너비 8.8m, 현존 최고 높이 5m이다. 서치성은 서벽의 중간지점에 있으며, 길이 14.3m, 너비 4.6m이다. 북서치성은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회절부에 위치하며, 길이 9.2m, 너비 4.5m, 현존 높이 2.9m이다. 동치성은 동벽이 남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6.6m, 너비 5.9m, 현존 높이 4.5m이다.

건물지는 헬기장 주변과 망대지 뒤쪽, 현재 성 안으로 진입하는 출입구 부분 등 여섯 곳에 걸쳐 확인됐다. 이 중 서쪽에 있는 건물지가 가장 주목되고 있다. 반월산성에서는 기와 및 토기조각 외에도 석기류와 철기류 등 귀중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무문토기편에서부터, 백제토기로 추정되는 원저호들과 통일신라대의 완과 대부완, 단경호류 등 긴 시 간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외의 유물로는 철제 초두(鐎斗)와 철낫, 철제 도끼, 철촉(鐵鏃) 등이 있다.

글마루 취재반은 성안에서 다량의 고구려계 와편을 찾았다. 그것은 적색을 띤 기와로 격자문, 사격자문, 승문(繩文) 등 다양했다. 만주 지안 국내성을 비롯해 오녀산성, 환도산성, 양구 비봉산성, 연천 고모루성, 아차성 등에서 수습된 평기와 무늬를 그대로 닮고 있다. 고구려 기와는 백제, 신라 기와에 비해 독특하다. 막새 와당 문양도 유약하지 않고 날카롭다. 그것은 대륙을 지배했던 강인한 정신을 드러낸다.

필자가 그동안 조사해온 만주 지안 국내성을 위시 평양지역에서 찾아진 고구려 기와는 대부분 적색을 띠고 있으며 용문과 연화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혹 마홀성에서도 이 같은 와당의 출현이 가능할까. 기와편이 발견되는 곳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그리고 서문지 입구 건물지에서 백제, 고구려 기와가 산란한 현장을 확인했다. 이 속에서 백제 소형의 무문 소형 막새를 수습했다. 무늬가 없는 이 막새편은 마홀성 초축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선문대(斜線紋帶)가 시문된 암막새로 보이는 기와 조각도 확인했다. 이 같이 백제, 고구려 기와의 뒤엉킨 모양은 이 성을 들러 싼 두 나라 쟁패의 역사를 입증하는 것 같다. 취재반은 산 정상에서 ‘애기당지’라는 방형의 석축구조물을 봤다. 이는 고구려 수도 지안에 남은 많은 고구려식 방형 고분의 모습을 닮아 있다. 치석한 네모난 돌을 다듬어 2단의 층단을 이루게 한 석축은 혹 고구려 장수의 무덤은 아닐까. 그것이 후에 무당들이 애기당지란 이름을 붙여 산신에 제사지낸 것일지도 모른다. 마홀성은 가장 완연한 고구려 성지이지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비록 사적 제403호로 지정됐지만 속설을 인용하여 궁예가 쌓았다고 기록한 안내판도 있다. 앞으로는 고구려 남방공략의 거점으로 가장 완벽하게 축성한 유적으로 재평가 돼야 할 것이다.

포천 반월성지에서 출토된 백제수막새와 암막새
포천 반월성지에서 출토된 백제수막새와 암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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