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예산 임존성
예산 임존성

철옹성 예산 대흥의 ‘임존성’

백제 불굴의 역사 현장 임존성(사적 90호)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다. ‘대흥(大興)’이란 이름이 백제 부흥의지에서 연유한 것은 아닌가. 임존성은 높이 484m 봉수산으로 불리는 산에 돌로 쌓여져 있으며 둘레 2450m나 된다. 이 성은 백제의 전형적인 ‘테뫼형’ 산성으로 큰 규모에 속한다. 여러 골짜기를 성 안으로 끌어안은 포곡(包谷)산성과는 비교된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서 수십만 나당 연합군의 공성(攻城)이 성공하지 못한 것일까.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홍주목 대흥현 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충청도 홍주목 대흥현 조에 임존성이 나온다.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 금주(今州)라고도 했다. 신라 때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여지승람> 고적(古跡) 조에 보면 흑치상지와 지수신이 등장한다.

“임존성(任存城). 이곳이 바로 백제의 복신(福信),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당 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와 항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현 서쪽 13리에 옛 돌성이 있는데, 그 주위가 5194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심컨대 이 성이 아닌가 한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본래는 백제의 지분촌(只分材)이었는데, 당(唐)이 지심(支潯)으로 고치고 지심주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인데, 청정(靑正)·고산(孤山)이다. 숙종 7년에 현종의 어태(御胎)를 묻어 군으로 승격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백제문화개발연구원의 자료(<충남지역의 문화유적> 제9집, 예산군편 1995)에는 임존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성의 외벽은 석축으로 하고 내벽은 토석 혼축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안쪽으로는 7~8m 정도의 내호가 돌려져 있다. 성의 정상부에는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어 건물지가 자리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남벽 쪽으로도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백제시대의 토기편과 와편 등이 산재되어 있다. 이곳에서 수습되는 유물을 보면, 기와는 대체로 무문이나 선문이 시문된 것으로, 태토가 고운 회백색과 붉은 기와가 대부분이다. 기벽은 대체로 얇고 그 중 모래가 섞인 것도 있다. 토기는 회청색 경질에 비교적 태토가 고우며 표면에는 승문과 격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성의 네 구석은 다른 곳보다 약 2m 정도 더 두텁게 축조하고 있으며, 성의 남문지는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져서 위치하고 있는데 방형 옹성을 설치했던 흔적과 폭 230cm의 문지 흔적이 남아 있다. 성벽에는 또한 폭 70㎝, 높이 90㎝의 배수구를 설치하고 그 위에 판석을 덮어 놓고 있다. 성의 서북쪽으로 폭 6m의 북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하면 대흥면 소재지에 닿을 수 있다. 성벽은 대체로 약 2.5m, 폭은 약 3.5m 정도이며 성벽의 상단부 폭은 1.6m 내외이다. 성이 위치한 봉수산은 산세가 험하고 예당저수지, 삽교, 예당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형으로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산세를 하고 있으며 주로 북쪽 곡창지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된 산성으로 보인다.”

그런데 필자가 잘 모르는 임존성에 대한 사실이 이번에 조사되었다. 즉 임존성은 특히 세계에 하나뿐인 수정식 산성이라는 것이다. 수정식이란 ‘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물을 잔뜩 비축해 두었다가 한꺼번에 터뜨려 적을 우왕좌왕하게 만든 후 총 공격을 감행하도록 설계된 성’이라는 것이다.

글마루 취재반은 북쪽 성벽 능선 위에 구축해놓은 1단의 긴 토루(土壘)를 찾았다. 이 겹성의 구조는 서쪽 망대에서 봉수산 정상에 이르는 성벽 위에서 확인된다. 높이는 목측으로 4~5m정도 되며 바깥 면은 인위적으로 삭토했다. 적군이 석성을 돌파하여 올라온다고 해도 겹성에서 다시 방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임존성은 테메식 성곽이지만 산 정상부분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였다. 성은 돌과 흙을 다진 판축성이지만 외면에는 정연하게 다듬은 돌로 석벽을 구축했다. 특히 꼬불꼬불한 능선은 자연적인 치성(雉城) 역할을 하였으며, 어느 방면으로 적이 공격한다고 해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백제 지역의 많은 성곽 중 가장 크고 치밀하게 잘 쌓은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임존성에도 남매 축성설화가 어린다. 즉 ‘묘순이 바위’에 얽힌 얘기다. 옛날 대흥현 고을에 힘이 장사인 남매가 살았다. 한집에 힘센 사람이 둘인 것을 용납지 않아 어머니는 내기를 시켜 한 자식을 없애려고 했다. 딸 묘순이는 성을 쌓게 하고 아들은 천릿길을 다녀오게 했다. 어머니는 아들 대신 딸을 희생시킬 마음으로 성 쌓는 시간을 지체시키려고 딸에게 뜨거운 종콩밥을 만들어 주었다. 이를 눈치 채지 못한 묘순이가 천천히 밥을 다 먹을 무렵, 남동생이 성 가까이 왔다. 묘순이는 깜짝 놀라 마지막 돌을 서둘러 올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돌 밑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묘순이 바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비 오는 날 돌로 바위를 두드리며 “묘순아, 종콩밥이 웬수지?” 물으면 “그려, 종콩밥이 웬수여.”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재미난 얘기도 전한다.

임존성 묘순이 바위
임존성 묘순이 바위

임존성의 영웅 지수신

영웅 지수신을 기록한 사서는 <삼국사기>다. 그런데 지수신의 행적은 열전에 누락되어 있다. 그가 누구이며 직급은 무엇인지 등 세계(世系)를 이해할 수가 없다. 흑치상지와 함께 거명된 것을 보면 달솔(達率)과 맞먹는 직책에 있었던 장군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왜 김부식은 지수신을 누락시킨 것일까.

그의 용맹을 기록한 내용은 <삼국사기> 본기 제6 백제 의자왕조이다.

“(전략) 이에 왕자 부여충승과 충지 등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군과 함께 항복하였다. 그러나 홀로 지수신만은 임존성에 의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前略. 王子 扶餘忠勝 忠志等帥其 衆與倭人並降 獨遲受信據任存城未下 云云).”

당나라 소정방은 임존성이 함락되지 않자 결국은 당군에 투항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무기와 양식을 주고는 공격토록 했다. 그런데 이때 당군 장수 손인사가 두 사람에게 무기를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유인궤는 두 장수를 믿자고 말한다.

“흑치상지들의 야심을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갑의를 주고 양속으로 구제한다면 도적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이때 유인궤는 말하기를 ‘내가 사타상여와 흑치상지를 보니 충성스럽고 지모가 있어 보여 기회에 따라 공을 세울 것 같은데 어찌 의심하리요?’(野心難信 若受甲濟栗 資寇便也 仁軌曰吾觀相如 常之 忠而謨 因機立功 尙何疑云云) ”

지수신은 결국 배신을 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공격을 받고는 투항하지 않고 임존성을 버리고 피신한다. 지수신이 처자를 그대로 두고 고구려로 도망하여 그 여중은 모두 평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二人訖取其城 遲受信委妻子奔高句麗餘黨悉平).

지수신은 주류성에서 고구려로 피신한 풍왕처럼 생사를 모른다. <일본서기>에도 등장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고구려 땅에서 한을 품고 살다 운명한 것이 아닐까.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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