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천지TV=김미라 기자] 강진만의 드넓은 평야와 구강포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펼쳐진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한 대숲과

잔설을 이기고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강진의 풍광.

그리고 그보다 더 진한 선인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개혁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을 꿈꾸며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다산.

정조의 두터운 신임 아래 두루 요직을 지낸 그는 실학자로서 배다리를 고안하고 거중기를 발명하는 등 큰 기술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도르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로 정조가 10년 계획으로 수립했던 수원 화성 건축을 단 2년 6개월 만에 완공시키면서 조선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찾아온 일생일대의 위기.

얽히고설킨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그의 정치 생명도 끝이 나고

젊은 시절 받아들였던 서학(西學, 천주교)으로 인해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에 휘말리게 되면서 기약 없는 유배기를 보내게 된다.

하늘이 장차 어떠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육신의 고난을 준다는 맹자의 명언처럼 다산은 인생 최대의 시련을 통해 18년 강진 유배생활 중 5백여 종의 방대한 저서를 완성하여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우뚝 서게 된다.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다 하여 다산(茶山)이라 불린 만덕산.

그곳에 다산이 10년간 기거하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이 있다.

과연 그는 이곳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여북하면 다산의 굴곡진 삶을 ‘뿌리의 길’이라 했을까.

위정자들의 부정부패와 당파 싸움, 지배층의 백성 착취가 만연했던 시절.

숙명처럼 받아들인 고난의 길이라 마음먹었을지라도 인생의 번민과 고뇌는 그를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았을 터.
다산이 매일 같이 걸었을 이 길에서 처연함이 묻어난다.

초당 곳곳에는 유배생활의 흔적과 정취가 그대로 서려있는 이른바 다산 4경이 눈에 띈다.

솔방울을 태운 불로 찻물을 우려 마셨다고 전해지는 ‘다조’와 호젓함이 흐르는 작은 연못인 ‘연지석가산’. 긴 유배생활로 지치고 피폐해진 마음을 이곳에서 달래지 않았을까.

그는 2000여권의 책을 동암에 가득 채울 정도로 학문을 깊게 탐구했고 후학을 양성했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동암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는데 목민관의 지침서이자 다산의 애민정신이 그대로 묻어난 목민심서(牧民心書) 또한 이곳에서 완성했다.

하지만 학문에 심취하면 할수록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같은 하늘 아래 어찌 한 피를 나눈 형제들을 볼 수 없단 말인가!

흑산도로 귀양 가 있는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는 다산의 애절한 뒷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모든 도(道)는 하나로 통한다고 했던가.

사상가로서 당대 최고 경지를 자랑하는 두 거목이 서로를 알아봤다.

다산이 깨달았던 서학과 혜장의 불교 경전 그리고 공통적으로 심취해있던 주역까지.

하룻밤에 서로의 학식을 다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이후 다산과 혜장은 각자의 종교와 학문을 뛰어넘어 절친한 벗이 되었고 언제든지 왕래하며 교류했다. 특히 다산은 초당에 은거하면서 항시 문을 열어놓고 혜장이 지나가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동백나무와 조릿대가 있는 길을 함께 발맞춰 걸으며 차와 시국담을 논했을 그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의 길을 걸어왔음에도 서로를 흠모하고 인정하면서 세상의 진리 곧 유불선 역시 결국 하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왕래하던 조릿대가 무성한 그 나지막한 오솔길을 필자는 ‘유불선 삼도의 길’이라 명명해 봤다.

그렇다. 모든 것이 원래 하나에서 나왔으며, 다시 하나로 회복될 때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다시는 분탕질 없는 고요와 평화의 세계로 회복될 것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돌 하나에 심겨진 절제미.

자신의 성씨인 정(丁), 자신이 곧 돌임을 나타내는 석(石)자에 오롯이 그의 사상과 정신이 녹아있다.

당시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만 골몰하던 권문세도가들에게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며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편에 섰던 정약용.

유배중에도 흔들림 없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백성을 위하는 애민사상은 ‘정석’이라는 간단명료한 두 글자에 선명히 투영돼 있다.

그가 곧 돌이요, 돌이 곧 다산이며, 삶이며, 정신이며, 사상이다.

몇 날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고 회복된다는 경자년(更子年)이 돌아온다.

다산과 선인들이 그토록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어쩌면 우리들에게 더욱 가깝게 와 있을지도 모른다.

다산과 멀어진 세월.
다시금 다산에게 배운다.

(고프로 촬영: 이상면 편집인, 글: 이예진 기자, 사진: 강수경 기자, 자막: 황금중 기자, 영상편집: 김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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