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어제가 24절기인 동지(冬至). 옛날에는 동지를 작은 설, 아세(亞歲)라고 했다. 이날은 옛 부터 팥죽을 쑤어 먹었다. 귀신들이 붉은 색을 싫어한다고 믿은 데서 생긴 풍속이다. 고대 장례풍속에 사자가 죽으면 시신에는 붉은 흙을 뿌렸던 것도 모두 악령을 쫓기 위함이었다. 

성경에도 출애굽 당시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를 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만 그 죽음의 재앙이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동서양의 악령을 기피하고 터부시하는 풍속이 비슷하다. 

동지팥죽 풍속은 중국에서 전래 됐다고 한다. 고려 후기 문명을 날린 이제현(李齊賢)의 익재집(益齋集)에도 동짓날 팥죽을 먹는 시가 실려 있다. ‘두죽(豆粥)’이란 시로 익재가 동지에 연경을 가면서 즐거운 명절을 부모님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적고 있다. 

- …(전략) 우리 집은 오늘 아침 형과 아우는 여러 종을 시켜서 팥죽을 끓일거야 / 우리나라 사람은 동지에 반드시 팥죽을 끓여 먹는다 / 채색 옷 입고 부모님께 헌수할 때 세상에 이런 즐거움 형용하기 어려울 텐데 / 아 못생긴 나는 무엇을 해보려고 이 좋은 동지에 먼 길을 걷고 있는지 / 편하게 앉아서는 나라 은혜 보답할 수 없고 더구나 내려진 간서 재촉이 심한 때문이네…(하략)- 

동짓날 팥죽 공양은 우물, 장독대는 물론 방, 마루, 광, 헛간에도 한 그릇씩 놓는다. 또 대문이나 벽에 뿌리면 귀신을 쫓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경상도의 동지 풍속은 특별하다. 동구 밖에 서있는 신목(神木)에 금줄을 치고 팥죽을 뿌려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호남지역에서는 팥죽으로 신년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했다. 

조선 말 문신이자 서예가 최영년(1856-1935)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동지날 세시풍속 기록이 보인다. “붉은 팥으로 집집마다 죽을 쑤어 문에 뿌려 부적을 대신한다. 오늘 아침에 비린내 나는 산귀신을 모두 쫓으니 동지에 양기가 나면 길한 상서를 맞는다.”

팥죽에 대한 설화도 많다. 고구려성인 청주 구녀성 축성설화는 팥죽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아홉 딸(九女)들은 성을 쌓고 아들 하나는 소를 몰고 한양을 다녀와야 한다. 지는 편은 모조리 죽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막판 딸들은 성을 다 쌓고 성문 위에 개석을 얹으면 끝이 났다. 그때 심판관 격인 어머니는 아들이 죽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딸들에게 팥죽을 쑤어 들고 갔다. 이제 너희들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죽을 먹으라고 했다. 딸들은 어머니의 제안에 고마움을 느끼고 죽을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죽을 먹기란 쉽지가 않았다. 이때 소를 몰고 서울을 다녀온 아들은 유유히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미는 딸들을 모두 참수 했다. 아들 선호사상이 비정의 축성설화(築城說話)에 가탁된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에 내려오는 팥죽설화는 봉이 김선달이 상한 팥죽을 동네 부자들에게 팔아먹는 해학을 담고 있다. 대동 강물을 팔아먹더니 그 다음은 꾀를 내어 식초같이 상한 팥죽까지 팔았다. 팥죽할멈 설화는 두메에 사는 할머니가 팥죽을 쑤어 잡아먹으려는 호랑이를 물리쳤다는 줄거리로 짜여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새해를 맞는다. 올 기해년은 황금돼지해였지만 큰 복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국민들의 삶과 직결 된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선거법, 공수처 설치법에 대한 여야의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북핵문제는 점점 꼬여 가고 있다. 동짓날 팥죽을 먹어 액땜을 했으니 내년만큼은 제발 악한 일은 물러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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