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답사 중에 찾아진 구석기 유물
답사 중에 찾아진 구석기 유물

삼복에 육계토성을 답사하다

글마루 취재단은 8월 초 삼복더위를 무릅쓰고 칠중하 육계토성을 답사했다. 서울서 약 1시간거리.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더위에도 육계토성의 흔적은 완연 취재반을 기쁘게 했다. 구릉의 붉은 점토대 농경지 곳곳에는 2000년 전의 적갈색 토기편과 연질 백제 토기편 그리고 삼국시대 통일신라기의 토기 조각과 고려·조선시대 와편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적갈색의 격자문, 사격자문, 승석문 계열의 와편도 찾았다. 한강변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합 양상이 드러난다.

그런데 더 이른 시기로 올라가는 돌 연모를 수습하기도 했다. 이는 구석기나 신석기, 청동기시대의 긁개나 망치돌이다. 전곡리 유적처럼 이미 수만 년 전부터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물이다. 원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 시기의 쇠뿔 손잡이도 찾아진다. 이는 수해로 인한 발굴 당시에도 찾아진 토기 손잡이와 같은 형태이다.

왜 초기 백제인들은 칠중하 변에다 이렇게 큰 토성을 쌓고 살았을까. 많은 노동력이나 조직이 아니고서는 이처럼 내·외성을 갖춘 대규모 성을 구축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초기 하북위례성의 고지일까. 이는 좀 더 많은 연구가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의 쟁패 유적 칠중성

칠중하 인근에는 <삼국사기>에 많이 기록되는 칠중성(七重城)의 고지가 있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에 소재한 고대 산성유적이다. 칠중성은 본래 적성현(積城縣)에 속한 땅이었다. <동국여지승람> 권 제11권 적성현 건치연 혁조에 ‘본디 고구려의 칠중현(七重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중성(重城)이라 고쳐서 내소군(來蘇郡) 속현으로 만들었다.’고 돼 있다. 칠중성은 <삼국사기>에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선덕여왕 시기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전투(638), 태종무열왕대 고구려와 신라 전투(660), 문무왕대 신라와 당의 전투(675)가 칠중하를 무대로 벌어졌다.

칠중성은 파주의 중성산(147m) 정상부와 서봉(西峰: 142m)의 능선을 따라 축성된 고식의 테뫼식 산성이다. 그리고 능선은 밑으로 내려오면서 자연 포곡을 이뤄 평지와 연결되어 있다. 실측 자료를 보면 전체 둘레는 603m이고, 남북 폭은 198m, 동서 폭은 168m로 작은 규모이다. 칠중성이 축조된 중성산은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육계토성이 있는 주월리·가월리를 포함한 임진강 일대까지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주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육계토성에서 출토된 쇠뿔 손잡이 토기
육계토성에서 출토된 쇠뿔 손잡이 토기

역사에 남을 칠중성 대당투쟁

통일신라 초기 대당 투쟁의 와중에 칠중성은 주목된다. 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에 저항한 것일까. 당초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약속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가 다스리고 자주권을 인정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욕심이 생겼다. 신라까지 접수하여 당이 직접 통치하려고 했다. 이것이 신라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을 분노케 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한다. 당나라 군대는 675년 2월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개시, 칠중성을 장악하려 했다. 총사령관 유인궤(劉仁軌) 군대는 말갈군을 시켜 바닷길로 들어와 임진강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끝내 승리할 수 없었다.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신라마저 당에 굴복하는 것은 싫어했다. 신라는 칠중성의 수성작전에 성공, 당나라군의 임진강이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최초로 외세를 물리친 역사적 사례로 평가된다.

당은 칠중성 패전의 책임을 물어 총사령관 유인궤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말갈출신 장군 이근행을 대 신라 정복전쟁에 내세웠다. 이근행은 말갈, 돌궐 등 용기병 20만 명을 앞세워 평양성에서 출발, 임진강 유역으로 치닫는다. 이근행이 출전에는 여전사이며 용감한 부인까지 동행했다. 그러나 매소성 전투에서 이근행군은 대패, 신라군은 3만 380필의 전마를 획득하기도 했다(<삼국사기> 본기 제7 문무왕 下, 秋九月 二十九日..李謹行 率兵 二十萬 屯 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 三萬三百八十匹其餘兵仗稱是云云).

칠중성은 2001년 단국대매장문화재연구소의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실측 조사되었고, 많은 유물들을 수습하였다. 조사보고서를 보면 성내에는 많은 군사 시설물이 조성되어 산성의 원형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추정 문터 3개소·추정 건물터 5개소·우물지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전체 석성으로 내벽과 보축, 외성벽이 여러 차례 중복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동벽·남벽에서는 내벽과 보축이 확인되었으며, 칠중성 전체 성벽외부에는 토루 및 석축단이 여러 군데에서 조사되었다.

지표조사 결과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일부 소량의 철제유물도 있다. 시기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이르기까지 연대 폭이 넓다. 유물의 대다수는 기 와편이고 토기는 소량이 수습되었다.

단국대 조사단은 기와류 중에서 ‘칠(七)’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주목된다고 밝혔다. 사격자문 형태의 평기와에는 명문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본격 발굴한다면 보다 정확한 와편을 조사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수습된 고구려 기와 파편에 주목했다. 적색의 기와 파편은 이미 연천 호로고루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기와의 특징을 닮고 있다. 태토는 잘 정선되어 모래가 거의 없다. 사실 이 같은 모양의 와편은 파주 오두산성, 강원도 양구 비봉산성 등에서도 같은 모양이 조사되었다.

토기는 대부분 백제, 신라계 토기가 수습되었다고 밝혔다. 고구려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점거했던 신라가 칠중성을 가장 중요하게 이용하였던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글마루 취재단은 칠중성을 답사하여 성내에 흩어진 와편과 토기편을 조사했다. 백제에서 고구려 신라로 이어지는 편린이 수없이 나타났다. 칠중성은 당초 백제가 육계토성을 쌓을 당시 일단 유사시 보민성(保民城)으로 역할을 했을 것이란 결론을 얻었다. 안보상 불리한 육계토성의 허점을 보완했던 것이다. 왕도 경영에서 흔히 보이는 예를 보여줘 주목되는 것이다.

파주 육계토성지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
파주 육계토성지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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