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남승우 기자] 한국장로교신학회가 22일 서울 강남구 유나이티드컬처센터에서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 세미나-신사참배와 한국교회’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2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한국장로교신학회가 22일 서울 강남구 유나이티드컬처센터에서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 세미나-신사참배와 한국교회’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2

한국장로교신학회 특별세미나

여전히 국가의식 내세워 변명

우상숭배 아니라도 ‘친일’ 행위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신사참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신사참배를 정치적인 행위, 곧 일본 제국에 대한 충군애국의 상징적 표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종교적 행위인가가 관건이었다…. 신사에 참배하는 행위가 종교적 행위라면 그것은 당연히 우상숭배가 되지만 그것을 애국적 행위로 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국교회가 일제강점기 시절,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을 버리고 신사참배를 한 지 올해로 81년이 지났다. 80년째를 맞는 지난해부터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목소리들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고, 이를 회개하는 기도회와 세미나 등 대대적인 행사들이 줄줄이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에 애국한 것이라는 이유로 우상숭배는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최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장로교 세미나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다시금 나왔다. 신사참배를 종교적 행위가 아닌 정치적인 행위, 애국적 행위로 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는 논리다.

한국장로교신학회는 22일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신사참배와 한국교회’를 주제로 특별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는 ‘한국교회와 신사참배 문제’ ‘주기철 목사의 투쟁과 오늘’을 주제로 각각 강연이 진행됐다. 먼저 ‘한국교회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발제에 나선 이상규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는 “일제는 (신사참배에 대해) 종교적 성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국가 신도’라고 정의하고 참배를 요구했으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았다”면서 “한국교회나 선교부가 하나의 연합 전선을 형성 하지 못한 것은 비극적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사문제에 대한 선교부간의 접근 방식이 달랐다”며 “신사참배를 명백한 종교 행위로로 해석한 선교사들이 대다수였지만, 일부는 신사참배를 정치적 행위 곧 국가의례라고 봤다”고 했다.

즉 당시 일부 목회자들이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논리로, 자기는 물론 교인들에게 독려했단 뜻이다. 일례로 당시 언더우드, 에드윈 쿤즈 등과 같은 선교사들이 있다. 이들은 신사참배가 비종교적이라는 일제의 설명을 적극 수용한 인물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신사참배는 예배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라고 믿는다”라고 하며 당시 교장을 맡고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만 보기엔 석연찮은 부분들이 많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이듬해 열린 총회는 예배보다 ‘동방요배’가 먼저였으며, 기미가요와 황국신민 서사를 제창한 후에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가 진행됐다. 설교 후엔 일본군 장병을 위한 묵도가 이어졌다. 사실상 신사참배가 예배의 일환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교계 안팎에서는 ‘자발적 결의’라는 지적이 크다. 실제 이후 총회에서는 국방헌금은 물론 일본군 위문금 모금안이 통과됐고, 급기야 1942년 총회에서는 애국기라는 명분으로 ‘조선장로호’라는 전투기가 헌납됐다. 이 전투기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투입됐다.

이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곧바로 신사참배 행위를 회개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18일 재건 노회가 열리고 두 개의 자숙안을 정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기성교회 인사들은 주남선 목사 등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감됐다가 출옥한 성도들과 마찰을 빚었다.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출옥 성도들의 비난에 대해 “신사참배는 각 개인의 양심문제로서 각자 충분한 심적 고통을 당했다”며 “이제 해방이 됐다고 해 신사참배자들을 죄인으로 운운하는 것은 비양심적인 행위”라고 반박했다. 결국 1951년 장로교회는 6.25 사변 직후의 총회에서 고신파를 정죄했고, 고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며 분리돼 별도 교단을 꾸렸다.

장로교는 1954년 제39회 총회가 되어서야 자신들이 했던 신사참배 결의를 철회했다. 하지만 개신교 내부적으로 이 철회가 형식적인 선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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