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행주산성 옛 우물
행주산성 옛 우물

한성의 회복과 경영

웅진에 천도한 문주는 다시 백제를 일으켰다. 왕성 인근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축조하여 나라를 잃은 한북의 민호를 옮겼다. 한북의 백성들이 문주의 그늘로 돌아온 것은 왕이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비록 왕도 위례성을 잃었지만 백제는 실지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三斤王)은 대두산성을 두곡(斗谷)으로 옮겨 쌓았다. 두곡은 웅진을 지키는 북쪽의 요새였을 게다. 그다음 즉위한 동성왕(東城王)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부흥시켰다. 이 시기 백제는 다시 한성에 진출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4(482)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타난다.

“9월에 말갈이 침입하여 한산성을 습격하고 3백여 호를 사로잡아 데려갔다(秋九月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

그리고 그 이듬해인 동성왕 5년 조에는 “봄에 왕은 사냥을 나가 한산성에 이르러 군민을 위문하고 10여 일이지나 돌아왔다(五年春 王以獵出至漢山城 慰問軍民浹旬乃還).”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이 시기 한산성은 백제의 영토로서 많은 민호가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동성왕 21(499)년에는 “여름에 한재가 들고 백성들이 굶주리자 2천 명의 한산 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하여 들어갔다”라는 기사가 있다.

무령왕 시기에 이르러 백제는 한성을 지키기 위해 국력을 집중한다. 즉 무령왕 7(507)년 5월에 “고목성의 남쪽에 이책(二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함께 공모하여 한산성을 치려고 횡악(지금의 강원도 치악산 횡성) 밑으로 진을 치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며 적을 물리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무령왕은 특별히 조상의 뼈가 묻힌 한성을 중요시했다. 왕은 523년 2월에는 한성에 행차하여 대대적인 성곽 수축을 지휘했다. 즉 “좌평 인우(因友)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하여 한북주의 군민으로 나이가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고 3월에 한성으로부터 웅진으로 돌아왔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된다. 이 시기 무령왕이 한성에 머문 기간은 1개월 가량이었다.

행주산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토기와편
행주산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토기와편

고구려 안장왕의 침공

고구려 안장왕이 백제를 침공한 시기는 안장왕 5(523)년이다.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침공했다(고구려본기 제7)”라는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백제 성왕 7(529)년에는 결국 고구려가 백제 오곡원(五谷原)을 침공, 3만 대군을 격파하고 이곳을 차지한 것이다. 백제가 국력을 집중하여 고구려 세력과 싸운 ‘오곡원’은 지금의 어디인가. 고구려 본기에는 “백제군 2000명을 살획했다(同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克之 殺獲二千餘級云云).”라는 기사가 나온다.

‘오곡’을 황해도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필자는 지금의 고양시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양시 대곡, 곡산역 일대의 평야 지대는 행주산성과 고봉현의 중간지점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쟁패지가 될 수 있는 곳이다. 행주산성 앞 한강을 삼국시대에는 왕봉하(王逢河)라고 불렀는데 행주산성을 일명 왕봉현이라고 부른 데서 기인한 것 같다. <삼국사기>에도 우왕현(遇王縣)이라고 기록된다(三國史記 雜志 四 地理二 漢州 漢陽郡條‘遇王縣 本高句麗 階伯縣 景德王改名 今 幸州云云).

‘달을성현’ 또는 ‘고봉현’은 지금의 고양시 관산동과 고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본래 달을선현은 교하군(坡州)에 속한 현이었다 (三國史記 雜志 四 地理二條 高烽縣本高句麗 達乙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단재 신채호는 <해상잡록(海上雜錄). 저자·연대 미상>이라는 옛 문헌을 인용해 <조선상고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의 태자 시절에 상인 행장을 하고 백제땅 개백(皆伯)으로 놀러갔다. 그 지방 한씨의 딸 주(株)는 미인이었다. 안장왕이 한씨 집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다가 한주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리고 고구려로 떠나면서 자신은 고구려 태자인데, 나중에 개백 땅을 취해 한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했다. 개백현 백제 태수가 한주의 미모를 탐하여 강제로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한주가 완강하게 거절했다. 분노한 태수는 그를 옥에 가두고 위협하고 감언으로 꾀었다. 한주는 옥중에서 정몽주의 시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단심가를 부르면서 자신의 굳은 뜻을 꺾지 않았다. 왕이 된 안장왕은 한주를 구하는 자에게 관작 등을 포상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자 안장왕의 여동생 안학(安鶴)공주와 사랑하던 사이인 장군 을밀(乙密)이 나섰다. 을밀은 한미한 가문 때문에 왕실과 결혼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조건으로 안학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하였다. 안장왕의 허락을 얻은 을밀이 몰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 땅에 들어갔다. 마침 개백 태수의 생일잔치 날에 끝까지 태수의 요구를 거부한 한주를 죽이려고 하자 군사를 일으켜 한주를 구하고, 개백현과 그 일대를 차지하여 안장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안장왕과 한주가 다시 부부가 되고, 을밀과 안학공주도 결혼했다.”

남부여(南夫餘)라고 국호를 고친 백제는 이 전쟁 이후 한성유역의 수복이 사실상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왕이 옥천지역에서 전사한 이후로는 한강유역의 일부마저 발판을 빼앗기고 말았다. 한강유역은 한동안 고구려, 신라의 각축장이 되었고 약 20년 이후 5세기 중반 진흥왕은 본격적으로 한산을 공략,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순행(巡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하기에 이른 것이다.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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