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계백현의 옛터 행주산성

안장왕과 백제 한씨 미녀의 설화

행주산성 대첩비각
행주산성 대첩비각

위례성의 이웃 한강 하류 계백현의 비밀

백제를 건국한 온조가 처음 왕도로 자리잡은 고대 한성(漢城, 위례) 백제는 개로왕 2(475)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개로왕의 대를 이은 문주왕부터 웅진 백제라고 구분한다. 졸지에 위례성이 피침 당했을 때 왕도 주변에 여러 성이 도와주지 못했다. 위례성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백제 계백현(階伯縣)도 그랬다.

백제 ‘계백현’은 고양시 행주산성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행주산성은 다른 여러 성에 비해 규모가 큰 이중성(二重城)이며 전략적으로 요충이었다. 왕도로 통하는 한강 하류를 장악했던 곳이며 고양 평야 지대를 관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계백현은 백제가 한성을 잃은 후에도 50여 년간 백제의 영역으로 존재했다.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처녀인 한씨(漢氏) 미녀의 고봉설화(東國輿地 勝覽 古跡 古 古峯縣條)는 6세기 초반 고구려와 백제의 쟁패 역사를 뒷받침한다. 설화의 주요 골자는 안장왕이 평민으로 위장하고 이곳에 내려와 한씨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고 그 힘으로 이곳을 점령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고전 <춘향전>의 스토리를 능가하는 고대의 로망이다. 이곳에는 한씨 설화가 어린 고봉산이 있으며 그 주변에서 고구려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행주산성은 임진 전쟁 당시 일본에 승리한 호국 유적이다. 조선 선조 때인 1593년에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이 성에서 힘을 합쳐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비교적 높지 않은 이 성에서 어떻게 십여만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이 성이 백제 계백현 치소(治所)이자 400여 년 백제의 심장과도 같은 성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적다. 이곳은 백제 많은 왕이 국력을 집중하여 지키려던 오곡원(五谷原)의 땅이었다. 이번 호에서는 백제 계백현 고지인 행주산성, 고구려 안장왕과 사랑한 백제 처녀 한씨 설화가 어린 고봉산 등 관련 유적을 답사해본다.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한강의 모습

하북 위례성 최후의 날

광개토대왕은 5세기 중반 5만 대군으로 남하하여 백제 북방 대부분의 중요성과 촌락을 공략한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임진강과 북한강 유역을 비롯해 남한강 일대의 주요한 거점을 잃고 말았다. 이러는 와중에 백제와 고구려는 점점 숙원(宿怨)이 쌓이고 말았다. 그것은 양국이 앞다퉈 위(魏)황제에게 보낸 글에서 밝혀지고 있는데, 백제왕은 고구려왕을 산돼지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양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졌으며 백제는 위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계획까지 갖게 되었다.

분노한 장수왕은 남하하여 백제 개로왕을 참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수왕은 백제를 치러 가기 전에 내부를 흔들어 놓기 위해 위례성에 승려 도림을 비밀리 잠입시킨다. 도림은 장수왕이 싫어 백제로 망명해 온 것처럼 위장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즐기는 것을 파악하고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이 왕성에 들어가자 개로는 도림을 불렀다.

“저는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그 묘리를 깨닫게 되었사오니 원컨대 좌우에서 모시도록 하여주소서.”

개로왕은 도림과 대국하였는데 국수(國手)이므로 상객으로 대우했다. 왕은 이때부터 나랏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림은 개로왕이 자신을 신임한다는 확신이 서자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것을 건의한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구(山丘)와 바다로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주신 험지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곽과 궁전을 수리하지 않으며 선왕의 뼈와 고관들의 해골이 땅 위에 나 뒹굴게 되어 강물로 흘러가오니 신의 생각으로는 대왕께서 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인가 여겨집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건의가 일리가 있다고 여겨 흙으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전과 누각, 대사(臺榭)를 짓되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큰 돌을 욱리하(郁里河)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넣어 묻고 강변을 따라 제방을 만들었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

이 때문에 궁 안의 재물 창고는 텅 비게 되었고 백성들의 원망 소리는 높아졌다. 도림은 백제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판단되자, 백제를 몰래 빠져나와 장수왕한테 갔다. 장수왕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9월 직접 5만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의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진격로를 따라 일시에 위례성으로 쳐들어 왔다. 당시 위례성은 남·북성 등 두 개의 성이 있었으며 고구려 군대는 두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공이 도림의 술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위례성을 지키는 백제 군사들은 고구려 군사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개로왕은 궁을 빠져나와 도망치다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고구려 군사들은 개로왕을 아차성(阿且城) 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장수왕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고 말았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의 응원

태자 문주는 성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신라 땅으로 달려가 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신라와는 특별한 충돌은 없었으며 고구려 세력의 남하 저지를 도모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던 모양이다. 문주는 신라 원군 1만 명을 데리고 위례성으로 돌아 왔다. 문주가 돌아왔을 때 위례성은 불이 타고 있었으며 고구려 군사들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다.

문주는 눈물을 머금고 이도(移都)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문주가 초토화된 위례성에서 왕위에 오른다면 또다시 고구려는 침공할 것이다. 이에 문주는 찬바람이 엄습해 오는 10월, 근신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남하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도착한 것은 마한의 구토이며 백제 담로가 다스리고 있는 고마나루 웅진(熊津)이었다.

행주산성 팻말
행주산성 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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