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부연마을
부연마을

강수의 아내가 살던 대장간 부곡

강수가 신라 무열왕 앞에서 말한 ‘임나가라’ 지역은 과연 위치가 어디일까.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충주를 ‘임나국의 고지’라고 했다. 강수는 ‘충주 사량인(沙梁人)’으로 ‘사량’은 신라 육부의 하나로 이는 진흥왕대 왕경 서라벌에서 충주로의 집단 이주된 가야인들이 살던 곳으로 해석된다. 강수의 이 말은 고대사 임나가라와 가야, 신라와의 관계 고리를 푸는 중요한 단서를 던져준다. ‘임나가라’는 고대사 연구의 주요 쟁점이 되어 왔다.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본래 가야 귀족이었던 강수는 사녀가 아닌 천민계급이었던 대장간 딸을 사랑했다. 강수는 이 여인과 사랑을 약속하면서 부모가 정해준 혼처를 외면한다. 그리고 끝내 이 여인과 백년해로했다. 강수가 부모를 설득하는 말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워할 바가 아니지만, 도(道)를 배우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부끄러워할 바입니다. 일찍이 듣기를, 옛사람의 말에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糟糠之妻) 집에서 내보내지 않고, 가난할 때 친하였던 친구는(貧賤之交)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강수가 살았던 임나국의 고지는 주덕이 아닐까.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사량(沙梁)은 지금의 주덕면 ‘사락리’로 비정된다. 사락리 뒷산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고대 성지가 글마루 취재단에 의해 발견됐으며 이곳은 요도천을 사이에 두고 철광산이 많은 주덕과 멀지 않다. 강수 아내는 부곡(釜谷)의 처녀였다. 부곡으로 비정되는 곳은 주덕면 금곡리와 대소원면 장성리 부연이다. ‘금(金)’도 쇠를 뜻하며 ‘부(釜)’도 쇠를 생산하는 이칭이다. 중국에서는 ‘釜’를 철의 제조, 폐철 혹은 생철이라고도 해석한다. 금곡리와 장성리 부연은 산 하나를 두고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이 과거 쇠를 주무르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려준다. 그러면 강수의 아내는 이곳에서 사량에서 요도천을 넘어온 강수와 밀회를 즐긴 셈이다. 글마루 팀은 혹한의 1월 초 주덕과 사락리 부연마을을 답사했다. 사락리 뒷산 정상에서는 삼국시대 판축성의 유구를 확인했다. 원 사락 일대를 답사, 임나인들이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부연에서는 찬 겨울 밭둑에 흩어진 고대 제철지의 요람에서 슬러지를 확인하려 했지만 꽁꽁 얼어붙은 밭둑에서 토기나 슬러지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취재반은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돌아왔다.

6, 7호 제련로(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6, 7호 제련로(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 달천 칠금동 철기 유적

충주 탄금대 칠금동에서 백제의 우수한 철기 제작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칠금동은 바로 악성 우륵이 탄주하며 살았다는 탄금대 바로 옆이다. 탄금대에도 산정상을 중심으로 고대 성지가 발견됐으며 곳곳에서 가야, 백제계 토기 편이 수없이 산란하고 있다. 그리고 토성지에서도 철기유적이 오래전에 찾아진 바 있다. 그런데 칠금동에서 다시 매우 중요한 철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철기 유적에서는 제련로(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드는 가마) 8기, 소성(불에 맞은흔적) 유구 1기 등 다수의 백제 제철 유구가 찾아졌다. 이는 충북 진천 석장리 유적에 이은 백제 철기 유적의 발견으로 중요하다. 이를 감안하면 충주는 국내 제일의 고대 철기 유적의 보고로 부각된 셈이다.

중원문화연구소 발표를 보면 200여㎡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4세기 대 백제의 대표적인 원형 제련로를 무려 8기(4호~11호)나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집약적으로 철 생산을 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면적당 조업구역의 밀집도로는 지금까지 발굴된 제철 유적 중 가장 높다는 것이다. 또한 충주 칠금동 유적이 오랜 시간 제철 조업을 해왔던 공간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제련로가 상하로 중복으로 축조됐다는 점이다. 1호 제련로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키 위해 작업장 하부를 50㎝가량 판 후 숯(5~10㎝)과 모래(30㎝), 점토(5~10㎝)를 차례로 채웠다. 그리고 약 20㎝ 두께의 벽체 외곽에 단단한 점토를 보강했다.

4호 제련로에서는 제련로에 중첩된 구덩이 내부에 탄화목(炭化木)이 발견됐다. 그리고 조사단은 탄화목 위로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찌꺼기인 슬래그가 흘러내린 형태도 확인했다. 또 동일 지역 내에 유구가 여러층으로 축조된 점이 확인됐다. 기반층 위로 총 4회에 걸쳐 슬래그 등의 철 부산물이 토양과 함께 매립됐고 매립된 층마다 다시 가마를 만들어 사용하고 또 폐기하는 등 같은 위치에서 철 생산이 장기간 이뤄졌다. 진천 석장리 백제 제철유적과 유사한 점은 제련로와 출토 송풍관(送風管) 등의 유물이다. 이미 탄금대 토성 내부에서도 철정(鐵鋌) 40매가 출토돼 칠금동 지역이 주덕 요도천 다인철소유적 진천유적과 더불어 백제 중요 철 생산 기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발굴을 주도한 연구소는 유적의 시기를 출토된 대형 항아리 편 등으로 미뤄 대략 4세기 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는 탄금대 일원에서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기라면 백제국력이 가장 강했던 근초고왕~전지왕 시기이며 칠지도를 왜국에 보낸 때다. 철기를 가장 잘 다루었던 고대 백제와 임나가라 그 역사의 비밀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있는 것이다.

충주 칠금동 백제 철 생산유적 전경(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 칠금동 백제 철 생산유적 전경(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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