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칠갑산에서 찾은 와편
칠갑산에서 찾은 와편

임시 옮긴 수도 피성은 어디

<일본서기> 천지(天智) 원년 조에는 ‘주유(州柔)는 험지에 있고 장기간 주둔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좋은 지형이나 복신은 피성(避城)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이 바로 <삼국사기>에 나타나지 않는 부분을 보충해 주는 주류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백제 복국군의 피성(避城) 이도(移都)에 대한 기사(662년 12월 1일)는 다음과 같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 풍장, 그 신하 좌평 복신 등은 치노타쿠츠(朴市田來津)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연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뜨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치노타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필자는 칠갑산과 가까운 청양읍내에 있는 백제치소 ‘우산성(237m)’을 상정해 보기도 했다. 청양 읍내에 있는 진산인 우산(牛山)은 ‘비산(雨山)’ 또는 ‘피산’으로 읽을 수도 있다. 우산성은 청양읍을 우회하는 지천이 자연적 해자(垓字)를 이루며 그 규모가 크며 평지와 연결되어 있어 난중의 임시수도가 될 만한 곳이다. 특히 성내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 토기편과 와편이 산란한다.

또 보령군 오천면 소성리 일대를 주목했다. 이곳은 칠갑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피성 기록 환경과 비슷하다.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연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뜨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또는 학성(鶴城,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산 24-1)을 피성 후보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학성산성은 속칭 ‘두루미산성’으로 불리며 전장 1.2㎞의 큰 성으로 인근에 사시량(沙尸良) 명문와편이 나온 장곡산성(1.3㎞)이 있다.

성재봉이 보이는 적곡리
성재봉이 보이는 적곡리

두솔성 안에 있는 폐사 도림사지

칠갑산 두솔성 안에는 도림사지(道林寺址)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산현 불우조(定山縣 佛于條)에 ‘도림 묘봉사 구재 칠갑산(道林 妙峯寺 俱在 七甲山)’이라 하여 조선 전기까지도 칠갑산에 도림사, 묘봉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림’이란 이름은 불가의 이상세계인 ‘도리천(忉利天)’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도림이 혹 백제복국군의 리더였던 도침(道琛)과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 도침은 승려출신으로 복신을 도와 백제 복국군을 이끌던 인물이다. 이 두솔성 칠갑산이 백제 주류성이라면 도침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절터는 지난 1973년 지표조사에서 ‘도림(道林)’이란 명문 기와를 수습하여 이곳이 도림사임이 확인되었다. 절터는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사면에 대지를 조성하여 가람을 세운 층단형 가람배치를 보인다. 절터에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단아한 3층 석탑이 현존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3층 기단 위에 3층 탑신과 상륜부로 구성된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탱주와 양우주가 있으며, 갑석은 얇고 평평한 4장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매우 균형 잡힌 형태이다. 1973년 해체 때 발견된 사리구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글마루 취재단은 도림사지를 답사해 현장에서 고려 시대 이전의 와편을 찾기도 했다. 이 와편은 방격자문(方格子紋)으로 고운 태토를 보여 사찰의 창건연대를 올려 보아야 할 듯하다. 특히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앞에 발굴로 드러난 여러 개의 석재에서도 고식의 것을 확인했다. 정연한 모양의 원형주좌, 몰딩이 있는 단계석의 파편은 고려 시기 이전의 역사다. 아름다운 백제 연화문을 조식한 석주(石柱)도 보인다.

한편 취재단은 백제 와당과 토기를 굽던 장평면 관현리 가마터와 적곡리, 분향리 등지를 답사했다. 적곡리에서는 성재봉에 축조된 두솔성 성지를 멀리서 확인하기도 했다. 왕이 직접 행하여 천신에게 제사 지낸 백제 가람 칠악사지(漆岳寺址)는 어디일까. 취재반은 절터가 있을 것으로 상정되는 여러 곳을 답사하기도 했으나 유적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관현리 등 다섯 지역의 가마터는 발굴 당시 모양대로 백제문화체험박물관(관장 이광열, 대치면 장곡리 153-5)에 모두 재현되어 있다. 그중 사비시대 연화문 와당이 눈길을 끈다. 백제 왕도 궁전 건축과 사찰, 칠악사, 주류성에서도 이 기와를 사용했을 것이다. 박물관 뜰에 전시된 목면 본의리 가마 출토 백제 토제 불상 대좌는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백제 전성기의 국력과 영화로움을 입증하고 있다. 칠갑산 아래 여러 유적에서 1천 400여년 전 나라를 다시 찾으려 했던 백제 유민들의 항성이 들리는 듯하다. 부여에 이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추가 등재되는 염원을 안고 아쉬운 마음으로 차를 돌렸다.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재현돼 있는 관현리 등 다섯 지역의 발굴 당시 가마터의 모습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재현돼 있는 관현리 등 다섯 지역의 발굴 당시 가마터의 모습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