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도림사지 가는 길
도림사지 가는 길

백가쟁명 주류성 여러 설

백제 마지막 왕도인 주류성(周留城) 위치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충남 서천 한산설(故 이병도 박사)이다. 지금까지 한산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또 지금은 작고하신 전 전주박물관장 전영래 박사가 제기한 전북 부안 우금산성, 그리고 故 박성흥 선생이 주장한 홍성설, 재야학자였던 故 김재붕 씨가 주장한 연기설(단재 신채호 설)이 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청양 칠갑산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고고학적 성과가 없어 정확히 어디라고 결론이 난 곳은 없다. 필자는 약 40년 동안 백제 복국운동을 연구하면서 주류성으로 비정 되는 곳을 모두 답사했다. 그중 청양 칠갑산 두솔성이 3년 백제 복국군의 항쟁 중심지로 여러 기록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주류성은 고기에 두솔성(豆率城), 주유성(州柔城)이라고 기록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와 <당서(唐書)>에는 ‘주류성(周留城)’으로 기록됐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두량이(豆良伊)’로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쓰누(州柔)’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의 기록을 보자.

“유인궤는 말하기를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그 무리가 모여 있으므로 만약 이를 이기면 제성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이 때 손인사와 유인원은 신라왕 김법민과 더불어 육군을 거느리고 진격하고 유인궤 별장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을 거느리고 배에 군량을 싣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향하였는데…(하략). (仁軟曰 周留城百濟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是於仁師 仁願及羅王 金法敏水陸軍進 劉仁軌 及別將杜爽 夫餘 隆帥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趨周留城 云云).”

여러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류성은 우선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었고 금강과 가까우며 하루에도 사비성 공격이 가능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특히 복국군의 내분과 복신의 죽음으로 상당수가 당군의 회유에 항복하면서 주류성이 힘없이 무너질 때 ‘당군에 항복하는 것은 돌아가신 복신장군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며 임존성으로 피신하여 마지막까지 항거하였다는 지수신(遲受信)의 기록을 감안한다면, 주류성은 임존성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기록에도 주류성은 산간의 험지에 있음이 나타난다. 천지(天智) 원년조에 ‘주유(州柔)는 험지에 있고 장기간 주둔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좋은 지형이나 복신은 피성(避城)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국문학자들은 주류성의 음운변화를 주류성→두류성→두루성→두솔성→도솔성으로 해석한다. 그중에서 두솔성의 솔(率)자는 발음이 ‘율’ 또는 ‘루’로도 읽는 다는 것이다. 즉 최초 두솔성을 두루성으로 표기한 것인데, 이 한자 발음을 솔로 읽어 두솔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충남대 교수였던 고(故) 지헌영 박사는 한 논문에서 주(周)를 우리말 두루, 두류로 해석하며 청양 정산의 두량윤성을 주목한 바 있다.

도림사지 터
도림사지 터

두솔산 칠갑산과 주류성

‘콩밭 매는 아낙네야 / 베적삼이 흠뻑 젖누나 / 홀어미 두고 시집가는 날 /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어린 가슴을 태웠소….’

주병선의 가요 칠갑산은 시골 아낙네의 한을 그린 노래다. 마티 터널이 뚫리기 전엔 가장 오지였던 칠갑산. 가요보다 더한 슬픈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 지18, 정산현 산천 편에 “七甲山 左縣 西十六里有古城其號慈悲城: 又見 靑陽縣 - 七甲山은 현 서쪽 16里에 있으며 옛 성의 터가 있는데 자비성(慈悲城)이라 부른다”고 기록됐다.

백제는 칠갑산(七甲山)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삼아 신성시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인 七甲山이라 불러 왔다. 즉 漆자를 ‘七’로 쓴 것은 일곱 칠이 천지 만물이 생성한다는 ‘七元星君’ 또는 ‘七星’과도 같은 風, 水, 和, 火, 見, 識에서 나온 것이다. ‘甲’자는 천체 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으뜸인 ‘甲’자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法王)조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출가시켰으며, 가뭄이 들자 ‘칠악사(漆岳寺)’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二年 春正月 創 王興寺度僧 三十人 大旱 王幸 漆岳寺祈雨). 칠악사는 다름 아닌 칠갑산이다. 백제 법왕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으로 수서(隋書)에는 여선(餘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 사찰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오합사(烏合寺), 천왕사(天王寺), 도양사(道讓寺), 미륵사(彌勒寺), 보광사(普光寺), 호암사(虎灸寺), 백석사(白石寺), 오금사(五金寺), 사자사(獅子寺), 북부수덕사(北部修德寺) 등이 있다. 많지 않은 백제 사찰 이름 중에 칠갑산에 있던 칠악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악사 위치는 지금의 어디일까.

자비성을 일명 ‘도솔성(兜率城)’이라고 했다. ‘도솔’이란 불가에서 ‘도솔천(兜率天)’을 지칭하는 용어다.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40리 거리)이 되는 곳에 있는 칠보(七寶)로 장식한 화려한 궁전이 있으며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또 도솔천을 ‘만족시키다’는 뜻으로 지족천(知足天), 묘족천(妙足天), 희족천(喜足天) 또는 희락천(喜樂天) 등으로 해석한다.

도솔천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원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머물고 외원에는 천인들이 오욕(五欲)을 만족하며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미륵보살은 내원궁에서 설법하며 인간이 사는 세상인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 때 미륵이 내려온 인간 세상은 이상적인 세상이 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교화시켜 성인이 되게 하고 열반에 든다고 한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로서, 정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미륵보살 신앙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삼국시대에 크게 융성하였다. 백제 무왕과 좌평적덕 따님은 미륵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륵사(彌勒寺, 익산)를 세웠다.

신라 고승 원효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행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칠갑산 도솔성의 풍왕은 바로 미륵보살이며 이들이 백제 구토를 회복하고 하생하겠다는 의지에서 붙여진 것인가. 그렇다면 칠갑산 주류성은 불교 사상적으로도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도림사지 삼층석탑
도림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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