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지난 16일은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난 날이다. 지난달에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40년만의 일이다. 국가가 깊이 반성해야 한다.

부마민중항쟁은 부산, 마산, 창원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모든 계층의 민중들이 합세해 거대한 시민항쟁, 민중항쟁으로 발전시켰다.

항쟁이 일어났을 때 박정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박정희의 담화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작금 부산에서 지각없는 일부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불순분자들이 국가현실을 망각, 외면하고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난폭한 행동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여 시민들을 불안케 하고 있음은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정부는 이와 같은 반국가적·반사회적 행동을 국가의 기본질서와 안전보장을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위협이라고 보고 부산직할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었다.”

항쟁 주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항쟁 첫날인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발표한 민주구국투쟁선언문이다. “한민족 반만 년 역사 위에 이토록 민중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고 수탈한 역사적 지배집단이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경제적 모순과 실정을 노동자의 불순으로 뒤집어씌우고 협박·공포·폭력으로 짓눌러 왔음을 YH사건(회사의 폐업에 항의하며 농성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사망자까지 낸 사건)에서 본다. 타율과 굴종으로 노예의 길을 걸어 천추의 한을 맺히게 할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조치 등, 불의와 날조와 악의 표본에 의연히 투쟁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장도에 나설 것인가?”

학생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박정희 정권을 몰아낼 때만 민중이 살 수 있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밝혔다. 박정희는 학생과 민중들이 왜 들고 일어났는지 근본 원인을 살피려고 하지 않고 ‘불순 세력이 선동해서 야기된 반사회적 반국가적 안보 저해 행위’로 바라보고 있다. 집권자의 생각이 국민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집권세력 안에서 상황을 정확히 진단한 인물이 있다. 19일 현장을 직접 둘러 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재판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 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자유민주주의 유린과 경제 실정에 따른 ‘민란’으로 보았다. 박정희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지 못한 탓에 ‘부마사태’가 났다면서 김재규를 책망하고 강경대응을 지시했다. 바로 옆에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200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하고 거들었다. 같은 자리에서 박정희는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했다. 얼마나 섬뜩한 말인가.

김재규는 공판에서 자신이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박정희 정권이 국민을 대량 희생시키는 끔직한 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지철과 박정희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김재규의 말대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재규는 ‘민주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의리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집권세력 안에 균열이 없었을 것이고 유신체제의 종말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신체제를 끝장내는데 부마항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기념관 하나 없다. 진상규명, 명예회복과 배상, 온전한 자리매김을 위해 온 국민이 함께 노력할 때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