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일석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 회장은 강제징용 피해자 돕기에 나서 36년 동안 일해왔던 삶을 풀어놓았다. 손 회장이 1984년 고창경찰서에 끌려가 일본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있지 않느냐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치아를 잃었던 사연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천지일보 2019.10.17
손일석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 회장은 강제징용 피해자 돕기에 나서 36년 동안 일해왔던 삶을 풀어놓았다. 손 회장이 1984년 고창경찰서에 끌려가 일본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있지 않느냐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치아를 잃었던 사연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천지일보 2019.10.17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 손일석 회장

 

36년째 강제징용 피해자 도와

초기 대공실서 고문 치아 상실

일본군 징병된 할아버지는 희생

가미가제 편성됐다 도망온 부친

 

“할머니‧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은

‘후손에게 이 역사 물려줘선 안돼’

유지 받들어서 피해자 돕기 나서

지원 없고 운영비 바닥 ‘도와달라’”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 이후 국내에서는 일본산 제품은 물론 일본 여행 등 불매운동이 대대적으로 확산됐고, 잠시 끓어오르고 말 것 같았던 이 운동은 지난 7월 시작해 석 달째 현재진행형이다. 반일감정도 덩달아 상승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이제라도 일제 강점기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가 있다. 우리나라에 일제 때문에 후손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단언하는 그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고, 가슴에 맺힌 울분은 탄식으로 터져나왔다. 군부독재 시절을 보내고 민주주의가 됐지만 일제에 희생을 당한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호소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겼다.

◆ 일제강점기 시대적 상흔 새겨진 가족

본지는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 손일석(62) 회장을 만나 일제강점기 피해자 유족들의 피해보상을 위해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피해자 후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고난의 길이었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동작구 상도3동의 연합회 사무실에서 손 회장을 만났다. 손 회장은 이혼 도장을 찍으라는 아내 몰래 츄리닝 차림으로 아침도 먹지 못한채 집을 나와서 기차역에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말했다. 1984년부터 올해까지 햇수로 36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관심을 보여준 기자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아내의 핀잔에도 전라북도 고창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올라왔다는 설명이다. 그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그의 곁에는 함께 이 일에 삶을 내어 던진 동생 손일용(55) 이사도 자리했다.

손 회장은 왜 이처럼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했을까. 그의 가족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같은 사연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8남매였던 할아버지 형제 중 세 사람이 일제에 강제로 차출돼 사망하거나 행방불명이 됐다. 그의 가족사는 곧 조선민족의 역사였다.

손 회장의 할아버지는 8남매 중 셋째였다. 1927년경 스스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먼저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는 손 회장의 아버지가 국민학교 1학년이 됐을 때 가족을 모두 일본으로 데려갔다. 문제는 전쟁이 터지고 발생했다. 일본은 할아버지를 해군 군속으로 끌고갔고, B-29 융단폭격기에 공격을 받고 방공호가 무너지면서 그의 할아버지는 나고야 변고현 신마치 고초메 대피소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이다. 이 외에도 할아버지 형제 두 사람이 일본 해군 차출 등으로 생사조차 알지 못하게 됐다. 손 회장은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가족 1인만 신고하라고 했다”며 “가족 친지, 장인 측까지 7명이 희생됐는데 신고조차 못하게 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손 회장은 일제로부터 희생을 당한 850만명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런 일이 더 이상 있으면 안 된다.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비극”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중국 해남도 현지에 방문해 철사로 묶여 있는 유골을 보며 손일석 회장이 울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당시 사진을 손 회장이 설명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진이 아직도 철사로 묶인 채 있는 현지 유골 모습. ⓒ천지일보 2019.10.17
중국 해남도 현지에 방문해 철사로 묶여 있는 유골을 보며 손일석 회장이 울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당시 사진을 손 회장이 설명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진이 아직도 철사로 묶인 채 있는 현지 유골 모습. ⓒ천지일보 2019.10.17

◆ 아버지도 가미가제 특공대에 희생될뻔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부친(손종표)도 동경에서 미대를 다니다가 가미가제 특공대에 편성 당했다. 일본인 친구의 조언으로 그의 부친은 도망나올 수 있었다. 손 회장은 “폭탄을 잔뜩 실은 비행기에 태우고 돌아오는 유류는 넣어주지 않는다는 말을 아버지가 그 친구에게 들었다”며 “일본인 친구는 절친이지만 다시는 못봐도 좋으니 꼭 도망가라고 조언을 했다”고 전했다. 그 길로 그의 부친은 밤 중에 짐을 싸서 고국으로 밀항해 들어왔다. 그러나 부산항에 들어와 전재산을 도둑맞았고 전북 고창으로 와서 미술 선생을 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의 부친은 82세 일기로 9년 전 한국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군부 독재시절이 지났지만, 정부는 더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일본에 공작금을 받고 있다는 모함을 받고 친일파 소리까지 들어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가 미술 선생으로 근무하며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훈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절대 군인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때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한 군인은 절대 정권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군인은 일을 쉽게 해결 하려고 정적을 칼로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의 아버지는 정치는 정치인이 타협해가면서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일본의 가르침을 전했다는 이유로 곧장 친일파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후 손 회장도 친일파, 일본에 공작금을 받고 있다는 등의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 “친일파 루머에 어금니까지 잃어”

이 때문에 손 회장은 경찰에게 얻어맞아 어금니를 잃고 틀니를 끼고 살아야만 했던 사연도 털어놓았다. 일본에 공작금을 받았다고 실토하라며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입주위가 피투성이가 되는 아들을 감싸며 경찰에게 간곡하게 빌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게 맞은 것보다 손 회장은 더 아팠다고 말했다. 그렇게 서러운 시대의 사연을 마음에 깊게 새기며 손 회장은 눈시울까지 붉혔다.

그럼에도 손 회장은 자신을 때린 이들까지 전부 끌어안았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군부 독재 때에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핑계가 있었다”며 “지금은 자유민주주의가 자리잡은 21세기 대한민국인데도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손 회장은 “할머니와 아버지는 네 후손에게 이런 역사를 다시 물려주지 않으려면 공무원보다도 이 길(피해자들을 돕는 일)을 택하라고 하셨고, 이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 나라 정부의 최고 관계자들의 행위를 생각할 때에는 정말 치가 떨린다”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일본 중국 미국을 오가며 피해자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힘을 썼지만 정부는 지원은커녕 나몰라라했다고 설명했다.

그 일례로 중국 해남도 현장을 들었다. 손 회장은 독립운동가들이 끌려가 산채로 죽임을 당했던 곳인데, 우리나라는 유해를 받아오지 않고 조사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손 회장이 현지 주민에게 들은 증언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한 날 이곳에서 수용 중이었던 조선인 1300여명은 산채로 손이 철사로 묶인채 곡괭이 등 둔기로 맞아 희생을 당해야 했다. 일제는 흔적을 감추기 위해 이들을 땅에 묻었고, 수용소에는 기름을 두르고 불을 질렀다. 현장에는 타다 남은 군복과 단추, 절반쯤 탄 한문과 한글을 병행해 기록한 수첩 등이 남아 있었다는 설명이다. 손 회장은 현장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살육의 현장이 있는데, 우리 정부는 모른채를 하고 있다”며 “외교부에 가서 이야기 했는데, 그 사실 조차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손 회장은 “지금도 유골이 철사에 묶여 있다.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렇게 해외까지 오가며 연합회를 이끌어오다가 지원이 부족해 논밭 1만 2000여평(약 3만 9669.4215㎡)을 팔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안을 돌보지 않는다는 집안의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제는 정말 갈 데까지 갔다고 토로했다. 월세가 밀려서 사무실을 빼라는 건물주의 요구를 듣고 있다고 고백한 손 회장의 얼굴엔 한숨과 함께 짙은 그림자가 어렸다.

손일석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 회장이 강제징용 피해자 돕기에 나서 36년 동안 일해왔던 삶을 풀어놓고 있다. ⓒ천지일보 2019.10.17
손일석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 회장이 강제징용 피해자 돕기에 나서 36년 동안 일해왔던 삶을 풀어놓고 있다. ⓒ천지일보 2019.10.17

◆ “강제징용 피해자 전수 조사해서 배상해야”

손 회장은 한일 관계가 진정한 우호관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이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회장은 “일본의 하토야마, 나카야마, 이노우에상 같은 사람이 있다. 한 번은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 갔는데 학생들이 무궁화, 아리랑, 애국가를 불러줬다. 그 자리에서 한없이 울었다”며 “이처럼 진실을 인정하는 진정한 일본인에게는 내 자신 스스로가 친일파가 돼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아베를 찬양하는 친일파가 아니다”라며 일본의 천장절 행사에 참여해 박수를 친 한국 보수 정치권을 꼬집었다.

손 회장은 종교계를 향해서도 “이슈가 되는 위안부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며 “정말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각성을 촉구했다. 한편 손 회장이 이끌어온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는 2015년 발족됐다. 일본의 강제징용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처벌을 요구하며 사법거래‧재판지연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특별법 제정, 강제징용 피해자 전수 조사 등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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