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경주출토 와당(백제 양식 포7)
경주출토 와당(백제 양식 포7)

부여 정암리 기와 굽던 유적 와요지

삼국 중 가장 아름다운 와당을 구운 백제 공방은 어디일까. 백제는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조와서(造瓦署)를 만들어 중앙 공급 식으로 기와를 공급했다. 1987년 7월 부여 정암리에서 뜻밖의 유적이 발견됐다. 와전(瓦塼)을 구웠던 가마터가 발견된 것이다. 호우로 가마의 천장 일부가 노출되면서 드러난 것이다.

이 유적은 부여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백마강변 내동부락(內洞部落) 일원에 있다. 가마터는 모두 11기가 조사되었다. 1988년부터 3차례 국립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원형에 가깝게 잘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 가마에서는 풍화암반층을 옆으로 파고들어가 구축한 지하식 평요(平窯)와 굴가마(登窯)가 함께 발견되었다. 아궁이·연소실·소성실(燒成室)·연도(煙道)·회구부(灰丘部)가 완전하게 남아 있어 세부구조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또 이 가마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는 군수리와 동남리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이곳에서 만든 기와가 부여의 주요 건물로 공급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정암리 와요지는 바로 관요성격을 띤 가마였던 것이다.

벽 그리고 그 뒤로는 산들이 겹겹이 들어서 있다. 산과 산 공간에는 송림(松林)들이 들어섰고 하늘에는 운문(雲紋)이 감돌고 있다. 또 하나의 화상전에는 선묘(線描)된 기와집 한 채, 오른쪽 절벽 사이에는 도사(道士)가 건물 쪽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 자연에 묻혀 살고 있는 백제의 신선의 모습인가. 삼국시대 후기 유행했던 도교와 신선사상의 영향이 만들어 낸 걸작으로 평가된다.

화상전 가운데 ‘괴수문전’이라고 불리는 유물은 기상이 힘차고 매우 역동적이다. 전 이화여대 박물관장인 강우방 박사는 이 괴수문전의 이름을 용문전(龍紋塼)이라고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강 박사는 언론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 분은 용이 연꽃 위에 서 있고, 다른 한 분은 물결 위에 서 있어서 영기화생한다는 광경은 같다. 무엇인지 모르면 괴운문(怪雲文)이라 부르듯, 무엇인지 모르는 동물은 모두가 귀신 혹은 괴수(怪獸)라 불렀는데 요즈음은 도깨비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람처럼 서있는 용’은 상상할 수 없어서 아무도 용이라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용이란 존재는 동양의 우주생성론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가장 근원적인 존재여서 모습을 원래 볼 수 없는 것이지만, 형상화시키되 변화무쌍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서 용은 사람 모습을 띠기도 하여, <산해경(山海經)>에는 ‘사람의 몸에 용머리를 한’ 영수(靈獸)의 표현이 여러 번나온다.”

연꽃무늬 화상전은 보기 드물게 연판 안에 장식을 하고 연주문대를 돌린 것이다. 백제 시대 와당에는 연주문대를 돌리지 않았는데 매우 이례적이다. 자방에도 크고 작은 연자(蓮子)를 여러 개 배치하였다. 다른 백제 와전에 비해 화려함을 돋보이게 한 것인가. 네 곳의 귀퉁이도 화형을 장식하여 네 개의 전이 합쳐지면 역시 연꽃을 이루게 하였다.

봉황무늬 전은 원형의 연주문대 안에 힘차게 나는 봉황의 모습을 배치하였다. 이와 발톱은 날카롭고 꼬리는 길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가느다란 운문이 봉황을 싸고 있으며 네 귀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또 하나의 봉황문은 동심원의 연주문 안에 하늘을 나는 봉황을 배치한 것으로 매우 역동적이다. 긴 꼬리와 힘찬 운문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역시 네 귀퉁이에 연꽃을 배치했다. 연꽃과 구름을 함께 응용한 화상전도 연주문대를 이룬 원형 안에 8판의 연꽃과 8개의 힘찬 운문을 배치한 것이다.

금강사지 터
금강사지 터

재현된 백제 왕궁 백제문화단지

찬란한 백제 문화 재현을 표방한 백제 문화단지는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있다. 이곳은 국내 최초로 삼국시대 백제 왕궁을 재현한 곳이다. 왕궁과 사찰은 모두 1백만 평에 하앙(下昻)식 구조와 청아하고 은은한 단청 등 백제시대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 특징이다.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에 근거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곳이다.

백제 유적에는 당시 건물이 한 건도 남아있지 않다. 부여, 익산, 공주 등 왕도에는 목조건축물은 하나도 없다. 다만 부여 정림사지 5층탑과 익산 왕궁리 5층 탑(일부 학자들은 고려 초로 봄) 부여박물관 청동 소탑 옥개석 등이 남아 당시 건축물을 상정할 수 있다.

백제문화재단지를 재현하면서 전문가들은 일본의 나라, 오사카에 있는 사찰의 건물을 많이 응용했다. 일본에 남아 있는 고대 건축물들은 백제인 혹은 후손이 만든 것으로 본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백제문화단지는 1994년부터 시작해 2010년까지 총 17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공공시설인 사비성(왕궁, 능사, 생활문화마을 등), 백제역사문화관, 한국전통문화학교와 민자시설인 숙박시설(콘도, 스파빌리지), 테마파크, 테마아울렛, 체육시설(대중골프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2006년 개관한 백제역사문화관은 전국 유일의 백제사 전문박물관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상설전시실을 비롯하여 기획전시실, 금동대향로극장, i-백제 체험장 등 다양한 전시·교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백제 왕궁의 처마에 얹히는 백제와당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와당은 백제 성왕대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들로 부여에서 출토된 것을 모방했다. 연판은 뾰족하지만 두툼하고 살이 쪄있다. 와당을 받치는 암막새도 당초문(唐草紋)을 쓰지 않아 고증에 신경을 쓴 눈치이다.

궁과 궁을 연결하는 회장에도 벽돌이 갈려 있다. 그런데 구암면 외리에서 나온 화상전은 찾지 못했다. 중요한 건물의 외벽에 한번 쯤 시도해 봄직도 한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와당들은 또 천 수백 년이 지나면 지금의 백제 와당처럼 유백색으로 변해 문화 복원의 대한민국식 유물로 평가될 것이다. 

백제문화단지
백제문화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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