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제철 풍산 화동양행 대표

호조태환권(제공: 풍산 화동양행)
호조태환권(제공: 풍산 화동양행)

호조 태환권(戶曹 兌換券)

인천전환국 설치와 때를 같이하여 신·구 화폐 교환업무를 맡아볼 태환서가 서울에 설치됐다. 태환서에서는 4종(50냥권, 20냥권, 10냥권, 5냥권)의 호조 태환권(戶曹 兌換券)을 발행, 이를 구 화폐와 교환함으로써 먼저 화폐제도를 정비한 후 신화폐의 생산량이 증가하면 호조 태환권을 다시 신 화폐와 교환하여 회수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인천전화국과의 갈등 등의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인천전환국의 운영권을 인수하면서 태환서를 폐지했다. 이에 따라 이미 제조됐던 호조 태환권은 발행되지 못한 채 소각 됐다. 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의미의 한국 최초의 지폐였다.

이화쌍용(제공: 풍산 화동양행)
이화쌍용 1원(제공: 풍산 화동양행)

이화 쌍용 시리즈(1892~1902)

1890년대 들어 당시 유통되던 우리나라의 화폐로는 외국과의 통상무역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일본의 권유에 따라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일본은 서울보다 일본인의 영향력이 컸던 인천에 전환국을 설립함으로써 보다 용이하게 조선의 화폐 발행권을 장악하게 됐다. 1892년 완공된 인천전환국에서 제조된 화폐는 5냥 은화, 1냥 은화, 2전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5종이었으며 경성전환국에서 발행한 주화의 도안과도 달랐다. 즉 앞면의 중앙상부에 태극무늬 대신 자두꽃무늬(李花章)를 사용했으며, 오른쪽의 자두나무 가지는 그대로 두었으나 왼쪽에는 국화인 무궁화 가지가 도안으로 사용됐다. 처음 제조한 주화에는 ‘개국 501년’ 연호를 쓰고 국호를 ‘대조선(大朝鮮)’이라고 표현했다.

이화쌍용 1푼(제공: 풍산 화동양행)
이화쌍용 1푼(제공: 풍산 화동양행)

조선 고종 30년(1893)에 발행된 1원 은화는 5량(5냥 은화)을 일본의 1원(圓) 은화와 동일한 가치가 있도록 만든 것으로 액면에 5량 대신 1원을 표시했다. 뒷면에 ‘닷냥’이라는 한글 표시를 그대로 둔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5량의 국호는 ‘대조선(大朝鮮)’이었는데, 1원 은화는 청나라 원세개(遠世凱)의 간섭으로 ‘조선(朝鮮)’으로 바뀌었다.

이화쌍용 5푼(제공: 풍산 화동양행)
이화쌍용 5푼(제공: 풍산 화동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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