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전경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전경

주목되는 중랑천 장한성 멸실 유적

<고려사 권71>에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 있다.

“장한성(長漢城)은 신라의 경계인 한산의 북쪽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에 중진을 두었으며 뒤에 고구려가 있었고, 신라인이 거병하여 이곳을 다시 회복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의 사냥터와 목장터(살곶이 목장)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고적조(古跡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중요한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 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을 신라에서 군사를 출동하여 회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서 그 공적을 기념하였다.”

<동국여지비고> 제2권 한성부조 고적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남평양성(南平壤城). 백제 근초고왕 26년에 성과 궁궐을 세워 서울을 옮겼으며 진사왕 7년에는 궁실을 중수하고 땅을 파서 산을 만들고 기이한 풀을 심으며 기이한 새를 길렀다. 개로왕이 궁실을 크게 세우고 국민을 동원하여 흙을 쪄서 토성을 쌓고 누각(樓閣) 대사(臺使, 높이 쌓아 위를 평평하게 한 곳)가 웅장하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하략)”

중랑천(中浪川)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장안벌로 불린다. 한자 표현으로 장안평(長安坪)이라고 하는데 ‘큰 벌판’이라는 뜻이다. ‘장안(중국, 西安)’은 당나라의 서울 이름으로 고대 국가들은 수도를 통칭해 ‘장안’이라고 불렀다. 장안 혹은 장한이란 이름이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 1970~1980년대 중랑천 유역에서는 삼국시대 유적이 찾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개발로 인해 깡그리 묻히고 말았다. 유물들은 백제 초기 토기들과 건물터였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 유물과 유적에 관한 보고서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많은 학자들이 장한평 일대를 하북 위례성으로 비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장한평에는 중곡동, 구의동, 중곡동, 건국대 캠퍼스 그리고 어린이대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그중 에서 가장 주목되는 곳은 바로 건국대 캠퍼스 안이다. 캠퍼스 안에 있는 2만 평 규모의 인공 호수 ‘일감호’가 있다. 이 호수는 1995년 캠퍼스를 조성할 당시 물이 많은 늪지대를 연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연못이 주목되는 것은 2㎞ 거리인 한강과 연결돼 있어 물을 끌어들일 수 있게 설계됐다는 점이다. 호수 안에는 소가 누운 형상이라는 ‘와우도(臥牛島)’라는 섬도 있다.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시에서 유래했다고 하나 인공섬으로 보인다. 대학 측이 설립 초기 이런 설계를 할 수 있었을까. 혹 진사왕 시기에 만들어진 궁지(宮池)는 아닐까. 땅을 파서 산을 만들었다는 기록과 ‘와우도’가 일치하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향후 이곳에서 하북 위례성 시기에 일실된 유적이나 유물이 찾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중랑천
중랑천

아차산 홍련봉과 연계된 토성지는 지금의 아차산역

어린이 대공원 북문과 연결됐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홍련봉에 관해서는 1942년 조선총독부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성지편에 수록되어 있으며 1994년 구리문화원이 조사한 지표조사에서 토기와 와편이 수습되었다. 특히 2004~2005 고려대 매장 문화연구소(현 고고환경연구소) 최종택 교수가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고구려계(北魏 영향)로 보이는 연화문 막새가 찾아진 적이 있었다.

홍련봉 출토 와당은 끝이 뾰족한 것으로 중국 북위 고토와 평양지역에서 찾아진 와당을 닮았다. 와당을 썼다면 궁성이나 사찰의 유지로 봐야 한다. 하북 위례성의 대단위 건축 공사가 있던 시기에는 남조(南朝)보다는 북위영향을 받은 기와들이 제작될 가능성이 있다. 이 와당들은 공주 부여시기 남조인 양(梁)나라 영향을 받은 연판이 후육(厚肉)한 와당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홍련봉 위에는 누각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 침류왕 2년(385) 한산불사 창사, 개로왕 18년조 ‘대사 유적(臺使 遺蹟)’은 아닌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유물의 발견과 연구가 따라야 할 것이다.

필자는 용마산에서 망우리로 넘어가는 산등성에서 긴 토성의 유구를 확인한바 있다. 고대 축성방식의 토루는 일부는 옮겨온 흙으로 또는 할석과 흙을 다져 쌓은 판축으로 구축한 것이다. 토루의 동쪽은 구리시로 아치울 등 포곡성의 유구가 존재한다. 이 일대에 대한 확대된 학술조사도 이뤄져야 한다.

고구려는 아차산과 용마산에 이르는 긴 산정에 보루를 잇는 토성을 구축하고 신라 공격을 막았다. 고구려의 저항에 신라군도 희생이 컸다. 결국 고구려는 용마산 장한성을 버리고 퇴각했으며 이후 용마산은 신라 장군 무력(武力, 가야 망명세력)이 지휘하는 신주군(新州軍)의 주둔지가 됐다.

건국대 일감호 와우도
건국대 일감호 와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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