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아차산 입구
아차산 입구

백제 초기 시조 온조가 세운 왕도는 ‘위례성’이었다. 고(古) 기록에는 하남(河南)과 하북(河北) 두 개의 지명이 등장한다. 하남은 지금의 어디이며 하북은 어디일까.

대부분 학자들은 백제 초기 왕도를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두 성에서는 궁성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그러나 아직도 백제 초기 왕성으로 단언하기는 부족한 점들이 많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강유역에 하남 위례성과 하북 위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북 위례성은 온조왕이 처음 도읍을 정한 곳으로, 하남 위례성은 온조왕 13년에 한강 이남으로 천도한 곳으로 보았다. 다산은 하남의 위치를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로 비정했다.

국사학계의 태두였던 고(故) 이병도 박사도 다산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발굴기관이 하남 위례성터로 추정해온 하남시 춘궁리, 초일, 광암동에 걸쳐 있는 이성산성(二聖山城)을 수차례 조사, 발굴한 결과 백제 초기 왕도를 입증할 고고학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

‘위례(慰禮)’란 지명은 어문학자들의 해석을 빌리면 울타리, 즉 ‘성’이라는 뜻이다. 위례가 ‘사방을 널리 둘러싼다’는 뜻의 위리(圍籬)와 음이 비슷하므로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례는 욱리하(郁里河), 아리수(阿利水)와 함께 한강을 가리키는 이두(吏讀)식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인 <주서(周書)>를 보면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다’고 나온다. 어라하는 중국말로 왕(王)이라는 뜻으로 위례는 ‘어라’와 함께 왕 혹은 크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위례성은 왕성 혹은 큰성(大城)이라는 해석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부여 출신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함께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각기 도읍을 정했다고 돼 있다. 온조는 10명의 신하들과 내려왔으므로 처음에는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가 나중에 백제로 고쳤다.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했으나 땅이 습지가 많아 살만한 곳이 못 되자 신하와 백성 모두 위례성으로 의탁해 왔다.

그런데 같은 책에는 온조왕 13년(BC 6)에 왕이 신하들에게 ‘동쪽의 낙랑(樂浪)과 북쪽의 말갈(靺鞨)이 자주 침범하니 한수(漢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뒤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하남으로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4세기 말 백제 근초고왕은 한강 남쪽에서 다시 본래의 왕성이었던 ‘한산’으로 이도하는 결단을 내린다. 이 기록은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지역으로 왕도를 옮긴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동일 지역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군사력으로 우위를 과시했던 자신감 있는 용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천도가 나중 개로왕 때 수도가 일시에 함락되며 왕이 참수되는 비운을 맞는 결과가 되었다. 한강 남쪽 하남 위례성에서 왕이 살았다면 고구려 군에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백제의 초기 왕성으로서 가장 국력이 왕성했던 시기 도성이었던 하북 위례성을 찾아 역사 여행을 떠나 보자.

아차산 출토 와당
아차산 출토 와당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도읍을 옮기다

백제는 678년의 역사를 지닌다. 그중 500년 가까이를 한강 위례성에서 사직을 보전했다. 공주, 부여 두 지역에서의 왕도 역사는 185년이다. 따지고 보면 백제 역사의 주 무대는 서울 한강이었던 셈이다.

백제 국력은 근초고왕대 가장 강성했다. 북방의 고구려도 감히 백제를 깔보지 못했다. 평양성을 공격한 근초고왕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고(AD 371) 북방의 여러 성을 견고하게 구축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남쪽으로는 영산강 유역, 서쪽으로는 낙동강 유역의 작은 소국마저 정벌해갔다.

<일본서기>에는 ‘366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 탁순국, 안라 등 가야연맹의 7개 소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기 호서·호남지역의 토착 세력인 마한제국을 실질적으로 병합시키기도 했다.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또 왜국의 사신을 위례궁성으로 초대해 각종 진기한 것을 보여주며 부강함을 과시했다고 한다. 당시 백제는 철기와 비단 등 선진문물을 제조할 첨단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왕은 왜왕에게 철제 칠지도(七支刀, 일본국보)를 하사했는데 이 유물은 현재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돼 있다.

문제는 왕도 하남 위례성의 규모와 안전이었다. 한강변에 구축된 몽촌, 풍납 두 개의 성은 지리적으로 수해가 잦았으며 적들이 침입할 경우 가까운 지역에 성민들을 보호할 산성이 없었다. 당시 백제의 주적은 고구려 혹은 말갈이었다. 또 커가는 신라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험준한 광주 검단산과 남한산성은 너무 멀었으며 신라 침공을 가정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근초고왕은 한산으로 도읍을 이전할 것을 결심한다. 한산은 지금의 북한산이 아니고 광진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 즉 용마산이다. 서울대학교박물관이 아차산을 발굴할 당시 성안에서 ‘한산(漢山)’이라는 명문 기와 조각을 찾았다. 아차나 용마는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아(阿)’는 크다는 뜻이며 용마(龍馬)는 왕을 지칭하는 것이다.

용마산 아래 지금의 장안동은 강 건너 풍납동보다는 한강의 수재를 덜 입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중랑천이 해자를 형성하며 남쪽은 한강이 막고 있다. 북쪽은 봉화산, 불암산 등 여러 산들이 중첩하여 목책을 구축한다면 고구려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기에 제격이다. 특히 전쟁이 발발할 경우 왕성의 많은 사람을 한산(용마산, 아차산)의 협곡으로 대피시킬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근초고왕은 한산을 의지하여 수도다운 토성을 쌓고 한껏 왕성다운 면모를 구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근초고왕의 손자 침류왕은 불교를 수용하며 한산에 불사(佛寺)를 창건하기도 했다. 이것이 백제불교의 효시다.

침류왕의 아들 진사왕은 할아버지에 이어 한성의 궁전을 수리하고, 성 안에 연못을 팠으며 진기한 금수와 초목을 길렀다(삼국사기 권제 25 백제본기 진사왕 7년조). 이는 백제 궁원 조영의 효시가 됐다. 이 궁원 기술은 나중에 일본에 전수됐고, 무왕 대에는 사비성(부여) 궁남지를 조영하는 기술로 발전했다.

아차산 발굴 현장 표지판
아차산 발굴 현장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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