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당성 발굴 현장
당성 발굴 현장

실크로드의 관문 ‘당성’

사적으로 지정된 ‘당성’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에 축조된 석성이다. 백제 시기부터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루트의 관문이었다. 얼마전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성 동문지에서 명문 기와 40여 점을 비롯해 백제 토기 1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명문 기와에는 ‘당(唐)’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당항성의 ‘당(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번 발굴 결과로 당성이 백제의 당항성일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특히 많은 양이 찾아진 백제 토기는 당성이 백제시대부터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첫 유물이다. 또 신라시대 유물인 ‘본피모(本彼謨)’ 글씨가 찍혀진 와편도 나왔다. ‘본피부’는 신라 6부의 하나로, 신라 6부 세력이 이주하여 당성 축조에 관여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다. 신라 왕도와 멀리 떨어진 지방 유적에서 신라 6부명 와편이 발견된 것은 청주 상당성 남문 아래에서 ‘사탁부(沙啄部)’ 글씨 기와가 찾아진 이후 두 번째 사례다. 청주는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된 곳으로, 이 유물을 통해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다.

당성 발굴현장에서 수습된 ‘館’자 와편
당성 발굴현장에서 수습된 ‘館’자 와편

글마루 취재팀은 동문지로 추정되는 지점의 절개된 백제·신라 와편 더미에서 우연히 ‘館’명 와편을 수습했다. 명문은 굵은 정자체로 양각됐으며 붉은 색깔로 모래가 많이 섞인 것이었다. 이 명문 와편은 이곳에 사신이나 정부 관리들이 묵었을 ‘동관(東館)’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백제 시대 당성은 한때 고구려에 복속되기도 했으나 신라가 차지한 이후에는 대규모 성으로 확장됐다. 그리고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요지로 활용됐으며 수차례에 걸쳐 보축이 이뤄져 오늘에 이른 것으로 파악된다.

 

당성 새로 쌓은 석축
당성 새로 쌓은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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