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일본에 불교 전한 백제 성왕은 어디에서 전사했나

백제의 한(恨) 어린 옥천 구진벼루

이원면 고이산 백제 판축성 확대 조사 필요

용암사에서 내려다 본 옥천군
용암사에서 내려다 본 옥천군

고대 백제사 흥망의 분수령

삼월이지만 아직은 쌀쌀하다. 소백산 줄기, 백제와 신라가 그토록 싸웠던 비극의 강 금강(錦江)변 산야는 잔설이 녹지 않고 있다. 이 비극의 강을 왜 ‘비단강’이라고 했을까. 금강은 멀리 전라북도 장수 신무산에서 발원한다. 그 물줄기를 모아 비교적 큰 내를 이루는 곳이 바로 충북의 보은과 영동, 옥천이다. 백제는 이 세 곳이 두 곳의 왕도를 감싸는 백강(白江)의 입구여서 매우 중요시했다.

신라는 일찍이 금강변인 옥천 청산과 보은을 향해 진출하고는 경상도 청년들을 모아 청산에 굴산성을 쌓고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삼년간 쌓았다고 기록돼 삼년산성이라고 했다 한다. 신라는 이곳에 용감하고 잘 훈련된 전사들을 배치했다. 백제와 신라가 사생결단으로 대치하게 된 것은 6세기 중반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대. 성왕은 불교에 심취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준 군주였다. 왕도를 웅진에서 부여로 옮긴 왕은 군사력에도 치중하여 변경인 옥천과 영동을 중요시 했다.

성왕은 당초 신라와 우호를 지니기 위해 진흥왕의 장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진흥왕도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성왕과의 연합을 원하고 있었기에 왕녀를 받아들였다. 두 나라는 이 시기만해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국경분쟁이 벌어졌다. 성왕은 옥천을 사수하기 위해 아들 태자를 이곳에 진주시킨다. 태자는 나중에 위덕왕이되는 창(昌)이었다.

창은 옥천의 서쪽으로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고리산에서 진주하며 신라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성왕은 삼년산성에서 출전한 고간(高干) 도도가 이끄는 신라 복병에게 사로잡혀 참수 당했다. 아들 태자를 위문하기 위해 얼마 안 되는 시위군사만을 대동하고 옥천 고리산으로 오다가 사로잡힌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일본서기> 등의 기록은 약간씩 차이를 보이나, 그중에서도 <일본서기>가 성왕의 전사를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성왕이 전사한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성왕이 전사한 곳을 삼국사기에서는 구진(狗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진이란 바로 ‘개천’이라는 뜻이다.

옥천에 ‘구진리’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과연 여기가 성왕이 사로잡혀 참수당한 곳일까. 백제와 신라가 그토록 처절하게 싸운 옥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이원면에 위치한 고이산성
이원면에 위치한 고이산성

옥천은 신라 고리산

옥천은 백제 시대 고리산(古尸山)으로 불렸다. 일부 기록에는 고리를 ‘고시산’으로 표기한 자료가 있으나 ‘고리’의 잘못된 표기로 해석된다. 고리산은 어디일까. 그동안 옥천지역을 조사한 선학들은 고리산을 환산(環山)에 비정했다. 고리처럼 생긴 산이라 하여 ‘환산’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이다.

환산은 옥천에서 대전으로 통하는 국도변 중앙에 있다. 이 산은 579m의 비교적 험준한 산으로 금강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산성에 쌓은 성이 흡사 고리처럼 생기기도 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곳이 지금의 옥천 이원면이다.

이원은 옛 이름이 고이산(古利山)현으로 고리산과 더불어 매우 주목되는 곳이다. 고이산과 고리산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옥천~영동 국도변에 자리 잡은 고이산성은 고식의 백제성으로 옥천으로 진입하는 신라군을 평지에서 방어할 수 있는 성이다. 산 정상에는 백제식 토석축성이 구축돼 있으며 백제와 신라의 토기편이 산란하고 있다.

이원현 일대에는 매우 재미난 지명이 많다. 고이산 성터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구짐터’라는 곳이 있다. 구짐터라는 이름은 구진터의 음운이화일 수 있다. 구짐터 바로 옆으로는 금강이 굽이쳐 흐른다. 또 ‘신개울골’이라는 곳도 있다. 이 중에서도 고이산성 주변 속칭 ‘구미리’라는 곳이 주목된다. ‘구미’라는 것은 우리말로 옛 성이라는 뜻이다. 구 현리의 이 지역은 비교적 나지막한 여러 주봉을 연결하여 토성을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혹 성왕이 전사한 곳이 고이산현 고성에서 가까운 구짐터는 아닌지 사료된다.

그동안 성왕의 전사지로 구전돼 온 구진벼루와 더불어 이 지역에 대한 확대된 조사가 필요하다. 성왕이 수만 명의 백제군을 데리고 처절하게 싸우다 전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감안한다면 고이산 구짐터일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은 보은삼년산성에서 출정한 고간 도도가 복병할 수 있고 또 전쟁이 발발하여 대단위의 신라군이 공격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고이산성 주변에서 발견한 와편과 토기편
고이산성 주변에서 발견한 와편과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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