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흔히 북한을 가리켜 부를 때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용어는 ‘굶주림’과 ‘아사’일 것이다. 1994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까지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것이었다. 김일성이 죽고 북한 경제가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지자 굶주림과 아사가 북한을 쓰나미처럼 덮쳐 버렸다. 그 ‘위대한’ 김정일 장군도 굶주림 앞에서는 한 포기 잡초에 불과했다. 얼마 전 한 탈북 여성이 서울 한 복판에서 굶어 죽었다. 그것도 어린 6살짜리 아들과 함께. 그가 집안에 남긴 것은 한 줌의 고춧가루가 전부였다. 한 줌의 쌀을 얻고자 목숨 걸고 국경을 넘은 한 어머니가 이처럼 쌀이 남아도는 나라에서 아사하는 현상 앞에 많은 국민들이 아연질색하고 있다. 탈북여성들은 거의 패닉상태다.

이 나라에서 3만 3000명 탈북민들은 아직 이방인 대우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철저하게 소외계층이며,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그 어두움을 박차기 어려운 빈곤계층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와 정권 담당자들은 ‘탈’자만 들어도 두드러기를 일으키고 있다. 그들을 돕던 사람들과 기업인들도 눈치가 보인다며 노골적으로 손사래를 흔들고 있지 않는가. 김정은에게는 그토록 아량 넘치고 베풀지 못해 안달해 하는 권력자들이 왜 탈북민들은 어둠의 자식으로 여기는지 그 답변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려운 일을 말 한마디에 도와주던 지인들이 곁에 없는 조건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막막함이란 잔인함이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존재론적 안정감’이 저하된 상태는 정착 초기 탈북자들이 훨씬 심했을 것이라는 공감은 누구나 가질 것이다. 탈북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는 불편한 진실도 있다. 자유를 찾아 고향을 버린 그들을 굳이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대체로 더 잘 정착하는 이들은 북한에서도 권력과 경제력을 누리던 부류다. 노동당 간부 부모를 만나 평양소년학생궁전에서 예술과 스포츠를 배운 이들은 한국에서도 예술가와 체육인으로 잘나갈 수 있다. 변방에서 굶주리던 보통 사람의 자제들은 한국에서도 하층민 신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아마르티아 센은 ‘왜 세상은 불평등하고 사람이 굶어 죽느냐’는 질문에 평생을 바쳤다. 1940년대 인도의 대량 아사(餓死·굶어 죽음) 사태를 연구한 그는 그저 ‘먹을 것이 부족해 굶어 죽는다’는 기존 경제학 통념을 깨는 결론에 이른다. 국가적으로 먹을 것이 충분한 상황에서도 정치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일하고 식량을 얻을 권리(entitlement)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1990년대 초중반 북한 경제위기 ‘고난의 행군’도 대표적인 경우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이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을 하면서 달러와 에너지, 식량난에 처한 당시 북한의 변방에는 국가의 배급이 끊어졌다. 시장에서 돈을 벌 능력도 없는 말단 하급 공무원들은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만 쳐다보다 굶어 죽었다.

경제 실정의 책임이 있는 공산당 간부들은 고기를 구워 먹다 남아서 버렸다는 증언들이 있다. 센도 북한 경제난과 기아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자유와 풍요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남한행을 택했다 관악구 임대아파트에서 굶어 죽은 한성옥 씨(42, 여)와 아들 김모 군(6)의 죽음에 대해서는 뭐라 할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한 씨 모자가 센이 말한 ‘생존을 위한 인타이틀먼트’에서 배제돼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이 고난의 행군 시절 같은 경제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고, 드물게 나오는 아사자들이 북에서 온 사람만은 아니다.

하지만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지적처럼 평양은 이 사건을 내부 선전에 적극 활용할 것이 분명하다. 센은 ‘풍요 속의 아사’라는 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개인의 역량(capability)을 키우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도 이번 사건이 국가에 기대서도, 시장을 통해서도 먹고살 길이 막막한 탈북자들이 없는지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을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