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사할린 탄광의 한인여성노동자들(국가기록원 사진) ⓒ천지일보 2019.6.7
사할린 탄광의 한인여성노동자들(국가기록원 사진) ⓒ천지일보 2019.6.7

사할린 동포의 역사… 하바롭스크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1993년 러시아 연해주 북쪽의 하바롭스크시를 방문했을 때였다. 시장에 갔더니 우리와 모습이 비슷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채소, 김치 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그중 단아한 모습의 한 할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이곳에 사시게 되었습니까?”

이름이 박봉순이라 밝히신 그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향은 대구였어요. 달성공원에서 놀곤 했지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오빠와 나를 키우셨어요. 일제 말기 오빠가 큐슈(九州) 탄광으로 징용을 가게 되었어요. 아들 하나에 온 희망을 걸어온 어머니는 오빠를 따라 나를 데리고 일본 큐슈로 갔지요. 오빠가 1년 뒤 사할린의 탄광으로 옮겨가게 되자 우리는 다시 오빠 따라 사할린으로 갔어요. 오빠는 1년 뒤 다시 큐슈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갈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데리러 오마.’라는 말을 남기고 오빠 따라 큐슈로 가셨어요. 얼마 있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나 사할린은 소련 영토가 되었어요. 사할린의 일본인들은 다 자국으로 귀환했으나, 우리 한인들은 한국이 소련과 국교가 없어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요.”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한 가족의 삶을 짓밟고 지나갔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사할린에 홀로 남게 된 나는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결혼하게 되었어요. 결혼한 후 사할린보다 살기가 나은 이곳 하바롭스크로 나오게 되었지요.”

하바롭스크에는 사할린에서 나온 동포들이 많았다. 그런 한인들 중에는 부자가 된 사람도 꽤 있다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시골에 다차(dacha, да́ча)라 하는 텃밭 딸린 별장 또는 전원주택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부지런한 한인들은 일찍이 비닐을 씌워 다차에 심을 각종 채소, 과일나무 모종을 키워 파는 일을 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다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KBS 해외동포 방송을 매일 들었어요. 가족을 찾는다는 사연을 여러 차례 방송국으로 보냈어요. 마침내 고향 가족들과 연락이 닿게 되어 사할린동포 모국 방문단으로 그리운 고향에 갔더니 어머니도 오빠도 돌아가시고 없고, 조카들을 만났어요. 세월이 많이 지난 것이지요. 어릴 때 놀던 달성공원에도 가보았어요. 그 후 매년 모국방문단과 함께 방문을 하는데, 갔다가 돌아오면 두 달 동안 골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리움과 그럴 수 없는 여러 사정으로요.”

“사할린 동포 모국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던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세요?”

필자가 물었다. 할머니 눈가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나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만, 우리 자녀들은 이곳에서 나서 자라 한국말을 모르는데, 내가 한국에 가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일제 침략이 만든 한민족 디아스포라(분산)의 고통이 거기 있었다.

 

1905~1945년 러일전쟁 후 해방 시까지 일본이 분단 점령한 사할린 지도(빨간색 부분이 일본령) ⓒ천지일보 2019.6.7
1905~1945년 러일전쟁 후 해방 시까지 일본이 분단 점령한 사할린 지도(빨간색 부분이 일본령) ⓒ천지일보 2019.6.7

사할린의 역사

사할린은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 위 동해와 오호츠크해 사이에 남북으로 900㎞나 되는 길쭉한 섬이다. 면적은 한반도의 1/3 정도인 7만 8000㎢로, 대륙과의 사이에 최단 폭 약 8㎞의 타타르 해협이 있다.

사할린은 러시아의 강제노동과 유배지였다. 그곳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부터이며 대개 연해주에서 건너갔다. 1897년 조사에서 사할린 인구 2만 8000명 중 한인은 67명, 그중 조선국적은 54명, 광산노동과 어업에 종사했고, 러시아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1명이었다.

일본에서는 가라후토(樺太)라고 부르는데,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북위 50도선이남 절반을 빼앗아 1945년 패전 때까지 40년간 지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이듬해 일본은 혁명의 자급을 막고자 시베리아에 7만 3천명의 병력을 파병하고, 그 참에 1920년 북사할린 마저 점령하여 7월 3일 일본영토로 선언했다. 사할린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일본은 약 1만 5천 명의 노동자, 관리, 군인, 학자 등을 파견했다. 일본의 북사할린 점령은 시베리아에서 철수 3년 뒤인 1925년에 가서야 끝났다.

북사할인 거주 한인들에게 1937년 9월 27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소연방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한인 강제이주 지령이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한인 1187명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북사할린 한인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 점령하의 남사할린에서는 중일전쟁 도발 후 1939년 9월부터 한국 내 한인들에 대한 대규모 강제동원 정책을 시작했다. 1939년 9월부터 1942년 2월까지 1단계 때는 ‘자발적’ 모양을 띤 동원이었다. 식민지하 국내의 열악한 형편 때문에 징용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고, 징용을 거절하는 경우 당국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두정구(1934년생)씨 가족의 이주는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우리 부모님은 한국 남쪽의 작은 촌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난하여 농부의 찌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1942년) 사할린에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 우리 가족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내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하셨습니다. 1년 후 아홉 살이 된 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사할린에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탄부로 일하시던 가와카미(川上) 탄광에 도착한 뒤 우리는 가건물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한인 노동자들이 강제노역을 했던 사할린 탄광촌의 모습 ⓒ천지일보 2019.6.7
한인 노동자들이 강제노역을 했던 사할린 탄광촌의 모습 ⓒ천지일보 2019.6.7

강제동원

많은 한인들이 군사비행장 건설, 철도부설, 탄광, 벌목 등 힘든 노동에 종사했다. 1942년 3월부터는 강제동원이었는데, 사할린의 박혜동씨의 경우가 그 예였다.

“1943년 1월 고향 마을에서 저를 잡아 부산으로 이송했습니다. 경찰분서에서 교도소 복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화물칸 안에서 어디론가 향했습니다. 와카나이(稚內)에서 우리를 배에 태웠습니다. 42명의 한인들은 가장 낮은 선창의 철판 바닥에 마치 짐짝처럼 던져졌습니다. 캄캄한 밤에 오도마리(코르사코프)에 도착했습니다. 그 다음 우리를 나이부치(內淵, 현재의 코프)로 데리고 가서는 그 즉시 일터로 내몰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석탄을 캐는 기계부품에 불과했습니다. 하루에 12시간을 일하며, 음식도 서서 먹었고, 한 번 교대할 때까지 각 광부들은 2톤의 석탄을 캐내야만 했습니다. 안전장치가 전혀 없어서 탄부들이 종종 붕괴된 갱도에 깔리기도 했습니다.”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이 도주하다 붙잡히면 반죽음이 되도록 패고, 다코베야(蛸部屋)에 가두었다. 다코베야는 칸코쿠베야(監獄部屋)라고도 하는데, 감금노동자들의 감옥형 합숙소였다. 감금된 노동자들은 다코(蛸: 갈거미)라 불렸다.

다코들은 서로 이야기를 금지당했고, 수갑을 차고 있었으며, 작업 기준량은 다른 곳보다 두 배로 높았고,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음식을 주지 않았다. 질서와 규율을 위반하면 가혹하게 매질을 당했다. 죽어 나가는 자도 심심찮게 있었다.

1944년 8월 11일 일본 정부는 사할린 광부 1만명을 가라후토에서 일본의 이바라키(茨城)와 큐슈 탄광으로 이송했다. 이 중 3190명이 강제징용된 한인들이었다. 박봉순 할머니의 오빠도 그중 한사람이었을 것이다. 사할린의 임태환(1932년생)씨도 어머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징용당한 아버지를 따라 사할린에 왔다가 아버지가 일본 이바라키 탄광으로 이중 징용되는 바람에 가족이 사할린에 남았는데, 종전이 되자 부친은 가족이 전쟁통에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하여 귀국하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사할린 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었으나 일본인만 귀국했고, 외교관계가 없는 한인들은 사할린 개발을 위한 노동력으로서 억류되었다. 사할린에 남은 한인들은 러시아어를 몰라 소련 치하에서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1951년 8월 18일 사할린주에는 4만 2916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1946~1949년 기간 중 1008명이 소련 국적을, 6346명은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 1만 5909명은 향후 모국으로 돌아가는 게 힘들어질까봐 무국적자로 남았다.

사할린은 접경지역이기 때문에 무국적자에게는 시민권, 노동권이 제한되었다. 또한 이주민에게 주는 기본급에 100%를 더 주는 추가임금과 주택 등 특혜가 없었다. 현지주민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 공산당 가입도 안 되었고, 선거권, 피선거권도 없었으며, 고등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매 3개월마다 비자등록을 해야 했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경우 경찰서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소련 치하에서 한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부정되고, 러시아화가 강요되었다. 한인학교들은 러시아어 사용 학교로 개편되었다. 1985년에는 3만 1664명의 한인 중 2만 522명이 소련 국적, 1259명이 북한 국적, 9883명이 무국적자로 남아있었다.

서울올림픽은 사할린 동포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갖게 했다. 이때로부터 설날과 광복절 등 명절을 지내는 전통이 살아났다. 한국에서 예술인들이 정기적으로 순회공연을 오기 시작했다. 일부 사할린 동포들은 모국 귀환이 이루어져 안산 등지에 정착했다. 그러나 박봉순 할머니처럼 사할린 동포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한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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