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쉬리(1999)’ ‘태극기 휘날리며(2004)’ 포스터
영화 ‘쉬리(1999)’ ‘태극기 휘날리며(2004)’ 포스터

1919년 ‘의리적 구토’ 첫 상영
일제 때 ‘아리랑’ 영화 수준 업
기생충에 韓영화 르네상스 기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국영화의 역사가 어느덧 한 세기를 훌쩍 넘어섰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영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 한국영화의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개화문턱에서 진기한 구경거리로 여겨졌던 영화는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매체로 자리 잡기까지 굴곡의 연속이었다.

◆국내 最古 극장 ‘단성사’ (1900~1910년대)
먼저 1902년 근대 극장의 시초인 협률사가 왕실 극장으로 개소됐다. 1900년 초부터 개화기 조선에 활동사진이 상영됐다. 어설프지만 상설관의 모양을 갖춘 것은 1906년 ‘동대문 활동사진소’라는 정식 명칭이 갖춰지면서다.

1907년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된 극장인 ‘단성사’가 세워졌다.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 영화이자 연쇄극(連鎖劇)인 ‘의리적 구토’가 이곳에서 처음 상영됐다. 연쇄극이란 ‘키노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불리는데,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 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형식이다. 영화에는 한강 철교, 남대문 정거장, 노량진 공원 등 서울의 이름난 풍경을 찍은 약 1000피트의 필름이 삽입돼 연극 중간에 상영됐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행한 책자에 그려진 극장 ‘단성사’ 이미지.ⓒ천지일보 2019.5.30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행한 책자에 그려진 극장 ‘단성사’ 이미지.ⓒ천지일보 2019.5.30

◆아리랑과 민족영화 (1920~1930년대)

1920년대 이후 경성을 중심으로 대중문화가 형성되는데 ‘영화’라는 용어도 일반화된다. 나운규, 이규환, 윤백남, 이필우 등의 영화인들이 대표작을 내놓았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 영화는 일본인 스태프와 자본이 제작에 참여했다. 최초의 극영화는 1923년 ‘월하의 맹서(윤백남)’다. 한국영화의 이념을 최초로 제시한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었다. 아리랑은 민족정신을 형상화했고 한국 영화의 수준을 올려놓았다.

1930년대부터 조선에도 발성영화가 수입·상영됐다. 첫 발성영화는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1935년)’이다. 당시 발성영화를 제작하기에는 녹음시스템, 방음장치, 촬영설비 등에 대한 환경 열악과 경험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춘향전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당시 입장료의 2배를 받음에도 흥행에 대성공을 거뒀다. 그 결과 발성영화 시기로서의 전환이 시작됐다.

◆해방 후와 6.25전쟁 (1940~1950년대)

해방 이후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1948년부터 20편을 넘겼다. 점차 제작 환경이 안정화되면서 한국영화의 모습이 찾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 발발로 영화산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촬영현장은 사라졌고 영화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1.4 후퇴 이후 진해, 대구, 부산 등 후방 도시의 군과 관으로 다시 모여 뉴스영화나기록영화 제작에 참가하며 종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게다가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라는 정책적 호재와 이규환의 ‘춘향전(1955)’의 흥행으로 한국영화는 성장기로 맞이한다. 당시 18편이었던 한국영화는 1956~1957년에 각각 30편 이상의 제작 편수를 기록하게 된다.
 

서편제의 한 장면. (출처:뉴시스)
서편제의 한 장면. (출처:뉴시스)

◆유신정권 탄생, 침체 연속 (1960~1970년대)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외양이 급격히 확대됐다. 1962년부터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는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흥행은 1970년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유신정권이 탄생했고 한국사회는 점차 경직돼 갔다. 텔레비전 보급률의 상승과 달리, 전국의 영화관과 영화 관객 수는 점차 줄었다. 1971년까지 200편을 넘겼던 한국영화 편수는, 검열 편수 기준으로 1972년 122편, 1973년 125편, 1974년 141편을 기록했다. 침체 분위기 속에 단비를 내려준 것은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이었다.

◆대중영화 새로운 장 열다 (1980~1990년대)

1980년대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에로영화가 성장했던 시기다. 그런가 하면 한국적인 소재와 한국의 역사를 주제로 한 영화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이 그 선봉에 있었다. 특히 판소리를 주제로 한 서편제가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

1987년 이후에는 민주화에 힘입어 그간 금기시됐던 사회문제들을 다룬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전쟁기 좌우익대립, 군부 독재 시설 학생 운동 등이 소재가 됐다. ‘영구와 땡칠이’ ‘우뢰매’와 같은 어린이 영화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등장했다. 1999년 개봉한 ‘쉬리’가 히트를 쳤다. 쉬리는 개봉 21일 만에 서편제의 한국영화 최고 기록을 돌파했다. 결국 전국 관객 620만명을 동원하는데 성공을 이뤄냈다.
 

28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영화 기생충의 언론·배급 시사회가 열린 가운데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천지일보 2019.5.28
28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영화 기생충의 언론·배급 시사회가 열린 가운데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천지일보 2019.5.28

◆21세기 한국 영화의 출발 (2000년대 이후)

2000년에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는 쉬리에 이어 또 한 번 영화계의 흥행 바람을 몰고 왔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양적 성장과 함께 전체 산업 규모까지 확대됐다. 2003년 개봉한 ‘실미도’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 ‘괴물’ ‘왕의 남자’ ‘해운’ 등 히트를 치는 영화들이 대거 등장했다. ‘타짜(2006)’와 같이 만화 원작의 한국영화도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13년에는 ‘설국열차’가 성공하면서 영화계에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올해 칸영화제의 주인공이 된 가운데 한국영화의 신(新)르네상스를 불러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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