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고려인 거리 옛 모습 ⓒ천지일보 2019.5.24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고려인 거리 옛 모습 ⓒ천지일보 2019.5.24

연해주 개척

올해는 연해주 한인들의 강제 이주 82주년이 되는 해이다. 연해주에는 약 20만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105개의 마을 또는 집단 거주지를 이루며 극동 러시아 개척과 농업개발, 도시, 도로, 항만, 철도 건설에 큰 공헌을 했다. 러시아 혁명을 위해서도 싸웠다. 그런 한인들에게 스탈린은 어느 날 갑자기 포고령을 내렸다.

“고려인들은 모두 짐을 싸라!”

1937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두 달 사이 연해주와 극동지역 한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화물열차에 타야 했다. 열차에 태워진 한인들은 수십일 동안 짐짝이나 짐승처럼 실려 가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등 ‘스탄’자가 붙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오늘날 약 55만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그런 부당한 운명을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프리몰스키 크라이(Primorsky Krai,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또는 프리모리예(Primorye, Примо́рье)라고 한다. 말 그대로 연해주(沿海州), 즉 바다에 면한 주라는 뜻이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약 900㎞나 길게 뻗어 있다. 수도는 블라디보스톡이며, 면적은 16만 5900㎢로 남북한 전체 22만㎢의 2/3나 된다. 하지만 인구는 희소하여 현재도 약 200만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도 연해주에 가면 눈길 닿는 곳마다 경작하지 않고 노는 땅이 즐비하다. 고려인들은 주로 연해주의 두만강에서 가까운 지역에 많이 살았고, 하바롭스크 등 아무르강 연안, 바이칼 지역 등지에도 살았다.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천지일보 2019.5.24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천지일보 2019.5.24

1847년 9월 5일, 38세의 니콜라이 무라비요프(Nikolay Muravyov, 1809~1881)는 이르크츠크와 예니세이스크(동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됐다. 바이칼 호수 동쪽 시베리아의 광대한 영역을 관할하는 총독이었다. 그는 시베리아에 아메리카와 같은 웅대한 러시아를 건설할 꿈을 갖고 있었다.

당시까지 러시아는 청국과 1689년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아무르강 훨씬 북쪽에 있는 스타노보이(Stanovoy) 산맥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의 연해주, 하바롭스크주 등과 함께 하구가 바다처럼 넓은 아무르 강(중국 측은 흑룡강)이 다 청국령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 관리들은 국경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멀고 인구가 희박하여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비요프는 아무르강 이북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주도면밀한 노력을 시작했다. 1851년부터 1853년 사이 여러 차례 탐사단을 아무르 하류 저지대와 사할린으로 파견하고,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 시기 청국은 아편전쟁을 겪으며 급속히 약화되고 있었다.

1954년 1월 11일 니콜라이 1세 황제로부터 청국과 아무르강 국경교섭의 전권을 위임받은 무라비요프는 그해 5월에 기선 아르군호가 이끄는 77척의 바지선과 뗏목으로 구성된 탐사대를 보내 아무르강 하류지역을 살펴보게 하고 곳곳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후 1856년 프리몰스카야 자치주(Oblast) 건설을 공표했다. 여기에는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주, 마가단 자치주를 포함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베링해협의 축치반도(Chukchi)에 이르는 동시베리아 전 영역이 포함됐다.

이후 1858년에는 청국과의 아이훈조약을 통해 아무르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하는 아무르강 이북 지역을 손에 넣고, 아무르강을 통해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2년 뒤인 1860년 무라비요프는 다시 북경조약을 통해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 지역을 손에 넣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 항구를 얻고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새로 확보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경을 따라 대략 4㎞에 하나씩 목걸이처럼 러시아인들의 정착촌과 군사, 교통, 통신망이 연결되어야 했다. 그래서 유럽 주민들을 이주시켜 왔다. 하지만 극동의 혹독한 겨울 추위와 여름 장마철의 높은 습도 등으로 유럽 이주민 대부분은 견디지 못하고 되돌아가 버렸다. 죄수를 데려와 자유민으로 정착하게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1859년부터 1882년 사이 20여 년 동안 연해주 지역에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 95개의 정착촌이 건설됐다.
 

연해주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의 현재 모습 ⓒ천지일보 2019.5.24
연해주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의 현재 모습 ⓒ천지일보 2019.5.24

연해주지역 정착촌 건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1860년을 전후한 바로 그 시기에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주변 세계가 어떻게 급변하고 있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왕의 외척세력이 권력을 전횡하며 온갖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60년간의 세도정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급기야 1862년에는 경상, 전라, 충청의 삼남지방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이른 바 삼남민란 또는 임술민란이었다. 게다가 북부지방에서는 가뭄 등 자연재해가 거듭됐다. 살길이 막막해진 북쪽지방 주민들은 처음에는 아침저녁으로, 그 다음에는 봄에 건너가 파종을 하고 가을에 추수하여 돌아오는, 국경을 넘나들며 월경(越境)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아예 국경을 넘어가 정착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당시 국경을 넘어가는 월경죄는 사형에 처해질 만큼 엄중한 죄였다. 특히 조선 유교문화 사회에서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해주에는 사람 손을 기다리는 땅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학정과 착취, 굶주림에 시달려 온 조선의 이주민에게는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공식 기록상 연해주 최초의 조선인 정착민은 1863년 12월 함경도 무산 출신인 최운보(崔運寶)와 경흥 출신인 양응범(梁應範)이다. 이들은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연해주의 국경 가까운 항구도시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해 지신허(地新墟)라는 마을을 건설했다. 이후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연해주에는 시지미, 연추(延秋, 烟秋, 煙秋, 안치혜) 또는 상별리(上別里, 상부 안치혜), 중별리(中別里), 하별리(下別里) 마을들, 추풍(秋風), 수청(水淸) 등 한국식 이름을 가진 마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지신허 마을만 해도 1864년 60가구 308명, 1868년 165가구, 1869년 766가구로 한 해가 다르게 커졌다. 1860년대 말 극심했던 북한 지방의 흉작으로 연해주 이주는 더욱 가속화됐다. 1882년에는 한인이 1만 137명으로 러시아인 8385명보다 더 많았다.

초기 제정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을 환영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면 15데샤티나(1데샤티나는 1092㏊, 1㏊는 3025평으로 15데샤티나는 약 4만 9550평, 약 250마지기)의 토지를 분배해 주어 조선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부자가 되었다. 귀화하려면 정교회로 개종해야 했다.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은 1만 2837명이었으며, 이들에게 준 분여지 중 경지는 1299데샤티나(약 393만평)였다. 이주 한인 중에서 러시아 국적에 입적하여 토지를 분여 받은 사람을 원호(元戶)라 하였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한인은 여호(餘戶)라 하여 원호나 러시아인 토지를 경작하는 토지의 소작인이 되었다. 그러나 편하고 부유하게 살기보다 조선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고자 개종과 국적 취득을 거부하는 한인들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옛 한인 거주거리와 집의 흔적. 이 집의 주소는 서울 거리 2A로 아직도 건물 벽에 표시가 남아 있다. ⓒ천지일보 2019.5.24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옛 한인 거주거리와 집의 흔적. 이 집의 주소는 서울 거리 2A로 아직도 건물 벽에 표시가 남아 있다. ⓒ천지일보 2019.5.24

총독에 따라 한인에 대한 정책이 우호와 적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1893년에 취임한 두호프스키(Dukhovskii)나 1898년에 취임한 그로데코프(Grodakov) 총독은 변강지역의 식민화에 한인들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패전 후의 운테르베르게르(Unterberger) 총독(1905~1911)은 ‘황화론(黃禍論)’ 즉 황인종 위협설을 들먹이며 한인들에게 관유지 임대를 금지했다. 그러나 후임 곤다티 총독은 긍정적이었다. 부정적인 경우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이 한 곳의 개척을 완료하면 다른 미개척 지역으로 이동시켜 그곳을 새로이 개척하도록 했다. 또한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거나 소작도 할 수 없는 한인들은 거의 노동에 종사했다. 이주 한인들은 농업·광산·부두노동, 산림 채벌, 공업(목수․석공․대장장이․토수), 철도, 기타 운수분야에 종사했다. 특히 광산노동에 많이 종사했는데, 1907년 통계에 의하면 광산에서 일한 한인 노동자는 3만명이었다.

러시아는 연해주에 도로와 항만, 군사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방상 필요에 의해 1891년부터 1916년에 이르기까지 26년에 걸쳐 10억 루불의 막대한 자금을 들여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도 시작했다. 한인들의 유입은 러시아가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절실히 필요로 했던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는 자국민의 식민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러시아인도 대폭 증가하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한인이 4만 5397명인 것에 반해 러시아인은 38만 3083명으로 증가했다. 이 시기 연해주 총인구의 73%를 러시아인이 차지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들이 모여들자 러시아 당국은 1893년 블라디보스토크 한 구역을 한인촌으로 설정해 주었다. 바로 개척리(開拓里)다. 개척리에는 ‘카레이스키 스카야’, 즉 고려인 거리라는 공식 도로명도 생겼다.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당국은 한인 집단 거주지를 시 중심에서 벗어난 외곽으로 옮기게 하였다. 새로 옮긴 한인 집단 거주지는 신한촌(新韓村)이다. 1910년 연해주 한인은 약 10만명으로 추산됐다.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갔을 때, 당시 한인사회에 최재형 같은 귀화 한인이 산업과 교육의 기반을 닦아놓고 있어 독립운동의 좋은 기반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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