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지난 7일 황령산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등 휴식을 취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5.13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지난 7일 황령산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등 휴식을 취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5.13

풍광 절정, 그 중 밤 풍경 ‘백미’

아경 즐기는 야간 산행 인기

사계절 관광객 발길 이어져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부산 중심에 자리해 빼어난 조망을 자랑하는 황령산에 오르면 부산 시내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부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명소인 황령산 정상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바로 조선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烽燧臺)다.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랜 유서를 가지고 있는 황령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세종 7년(1425년)에 맨 처음 문헌으로 나타난다.

봉수대를 등지고 바라보면 눈앞에 광안대교가 바다를 품고 있다. 좌측으로는 해운대 마린시티, 우측엔 문현금융단지를 넘어 부산항대교, 영도봉래산, 부산진구 서면중심부, 주례 등 김해평야까지 펼쳐진 풍광은 시민과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다.

최근엔 아무추어·프로사진사들도 자주 찾는 단골코스 중 하나다.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맑은 날에는 대마도도 볼 수 있다.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황령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산진구 가야, 주례 일대 모습. ⓒ천지일보 2019.5.13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황령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산진구 가야, 주례 일대 모습. ⓒ천지일보 2019.5.13

◆부산의 중심에 우뚝 선 황령산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산 이름은 누를 황(黃)자를 써서 황령산(黃領山)으로 현의 남쪽 5리에 있다고 했다.

해발 430m가량 되는 황령산은 금련산맥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부산진구, 연제구, 수영구, 남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이 높지 않아 인근 주민들의 등산지로, 아베크족의 데이트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황령산 봉수대로 향하는 드라이브 코스도 인기다. 특히 부산의 야경을 즐기며 걷는 야간산행 코스도 유명해 부산을 찾는 관광객의 ‘필수 관광코스’로도 입소문이 자자하다. 부산불꽃축제가 열리는 시즌에는 도시 야경과 어우러진 불꽃축제의 장관을 감상하기 위한 관광객들의 자리경쟁도 치열하다.

산역이 그리 넓지 않아 남천동, 전포동, 망미동, 광안동 등에서 2~3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산 중턱에 마련된 전망대에 올라서면 광안대교와 남구 이기대 너머로 펼쳐진 에머랄드빛 바다가 막혔던 가슴을 뻥 뚫어주는 듯하다.

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동쪽으로 황령램프, 북항, 광안대교, 해운대, 서쪽으로 서면을 지나 개금과 가야를 지나 김해평야로, 북쪽은 연제, 동래 금정산 기슭, 남쪽으로 범일, 영도와 부산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마산에서 산행을 온 최미경(52, 여)씨는 “날씨가 너무 좋아 일행들과 황령산 산행 차 부산을 찾았다”며 “정상인 봉수대에서 부산 시내와 광안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대이상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산진구에 사는 최병덕(55, 남)씨는 “운동 삼아 황령산에 오른 지 수십년이 됐다”면서 “하지만 최근에는 미세먼지로 인해 자주 오지는 못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 다행”이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황령산 정상에 설치된 황령상 봉수대. ⓒ천지일보 2019.5.13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황령산 정상에 설치된 황령상 봉수대. ⓒ천지일보 2019.5.13

◆황령산봉수대(荒嶺山烽燧臺)의 역사

부산의 중심에 있는 ‘황령산’과 ‘봉수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원거리 통신 수단으로 사용된 봉수대는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랜 유서를 가지고 있다. 황령산 봉수대(烽燧臺)는 1425년(세종 7년) 문헌으로 나타난다. 1989년까지 사용된 봉수대는 서쪽 초량의 구봉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동쪽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와 북쪽 범어사 동북쪽의 계명산 봉수대에 전달해 최종적으로 서울 남산의 경 봉수대까지 변경의 상황을 전하는 부산 봉수망의 중심이었다.

봉수대는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돼 온 중요한 통신시설로서 변경의 긴급한 정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했다. 대략 수십 리 간격으로 후망의 요지가 되는 산정에 봉수대를 두고 낮에는 섶나무와 짐승 똥 등을 사용해 연기로, 밤에는 불을 지펴 신호했다.

부산지방에는 계명산과 황령산·간비오산·구봉·오해야·응봉·석성 봉수대 등 일곱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 그 중 오해야 봉수대는 영조 때 폐지됐고 석성 봉수대는 현종 때 구봉에 합쳐져 폐지됐으며 나머지 5개소가 영조 이후에도 계속 존치됐다.

중요한 통신시설이었던 봉수대는 평상시에는 일거(一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이거(二炬),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삼거(三炬), 우리 변선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사거(四炬), 왜적이 상륙하거나 적과 접전하면 오거(五炬)로 홰를 올리는데 변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서울로 연락했다.

만약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의 전달이 불가능할 때에는 포성이나 뿔나팔, 징 등으로 알리고 여의치 않을 경우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했다.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전망대 너머로 광안대교, 남구 대연램프 등 일대 모습. ⓒ천지일보 2019.5.13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전망대 너머로 광안대교, 남구 대연램프 등 일대 모습. ⓒ천지일보 2019.5.13

부산의 다대포에 왜적이 나타났을 때 한양까지 정보를 알리는데 38곳의 봉수대를 거쳐 약 12시간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봉수의 근본 노선을 직봉(直烽)이라 해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남북은 강계와 의주, 서남은 순천 등 5곳을 기점으로 하고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종점으로 했다. 이외에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있었는데 직봉과 직봉을 연결하거나 변경의 초소로부터 본진(本鎭)·본읍(本邑)을 연결(단거리선)해 주었다.

각 봉수대에는 도별장(道別將) 1인을 두고 그 밑에 별장(別將)·감고(勘考)·봉군(烽軍)을 뒀는데 별장은 황령산·계명산 봉수대에 각 10인, 응봉·구봉·간비오산 봉수대에 각 6명을 뒀다. 감고는 봉수대마다 각 1명을 뒀고 봉군은 각 100명씩 배치돼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4일 황령산 봉수군 배돌이가 부산포에 왜군이 침입했음을 알린 사실이 ‘충무공전서’에 기록돼 있다.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략 때마다 신호를 올리던 이곳 봉수대를 우리 민족의 향토수호 의식과 국토방위 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1976년 10월 부산항 개항 100주년을 맞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2000년 6월 주변 정화사업을 실시했다.

황령산봉수대 전망데크는 2016년 11월 10일 준공해 부산의 도심 황령산에서 부산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봉수대까지는 아스콘 포장도로가 깔려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비교적 산새가 험하지 않아 야간 등반도 가능하다.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황령산 등산객들이 쌓아올린 돌탑. ⓒ천지일보 2019.5.13
[천지일보 부산=김태현 기자] 황령산 등산객들이 쌓아올린 돌탑. ⓒ천지일보 201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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