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김천=원민음 기자] 시조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정완영 선생은 경북 김천시 봉산면에서 태어났으며 약 3000수 이상의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정완영 선생의 흉상과 그의 내력이 보인다. ⓒ천지일보 2019.5.1
[천지일보 김천=원민음 기자] 시조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정완영 선생은 경북 김천시 봉산면에서 태어났으며 약 3000수 이상의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정완영 선생의 흉상과 그의 내력이 보인다. ⓒ천지일보 2019.5.1

경북 김천시 백수 문학관

애장품·집필실 볼수 있어

백수의 작품과 고향 사랑

[천지일보 김천=원민음 기자]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람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백수(白水) 정완영의 시 ‘조국’이다. 봄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는 지난 27일 오직 시조 시인으로서 한길만을 걸어왔던 조국의 저자 정완영 선생을 찾아 ‘백수 문학관’을 찾았다.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91번지에 있는 백수문학관은 선생이 살아생전 시조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으로는 국내 최초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특히 문학관 한편에는 그의 창작활동을 도왔던 집필실이 보인다. 집필실 외에도 시인이 소장했던 물품과 문학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과 3000여점의 기증도서를 비치한 자료실, 세미나실과 수장고 등으로 이뤄져 있다.

김천시는 지난 2008년 국비 등 23억원의 예산을 들여 12월 10일 문학관을 개관했다. 백수 문학관 관계자는 본지 취재팀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백수문학관을 방문하는 사람 누구나 해설사를 통해 백수 선생의 삶과 작품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학관을 통해 느끼는 백수 정완영

백수문학관을 들어서기 전에 주변의 자연을 보고 자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해설사와 동행하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김진희 해설사는 먼저 정완영 선생의 삶과 작품에 대한 설명을 위해 문학관 전시실로 향했다.

전시코너는 총 7개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시인의 흉상과 내력으로 시작된 시인 연보를 통해 그의 삶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내력에서 발걸음을 옮기면 창작 시집과 사진을 전시해놨고 문학적 배경을 설명해 놓은 곳도 있다.

또 청마 유치환 선생과 구상, 박목월 시인이 보낸 서간문 등 문인과의 교류를 통해 시조 시인으로서 생전 백수 선생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창작 모습과 조국, 모과, 을숙도, 추청, 겨울나무 등 그의 대표 시조를 걸어놓은 패널이 풍경 사진을 배경으로 걸려있고 탁본도 전시돼 있다. 특히 정완영 선생이 즐겨 입던 옷을 비롯해 작품 원고, 벼루와 붓 등 선생의 애장품과 유품도 구경할 수 있다. 김진희 해설사는 “전시된 자필 문건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꼼꼼하게 작성한 일기장”이라며 “1960년대 신춘문예 등단 이후 거의 매일 일기 형식의 글을 쓰고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완영 선생은 3.1 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 김천시 봉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투철한 자연 관조와 전통적 서정 세계를 바탕으로 여러 대상을 시적 상상력으로 변용하거나 개성적인 표현기법을 써서 시조 본래의 운율과 조화를 이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1923년 조부로부터 한학과 주학을 배웠으며 1927년 봉계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 4학년 때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일본 각지를 유랑했다. 1932년 오사카 천황사 야간부기 학교에 입학해 2년 수료 후 귀국해 보통학교를 마쳤다. 이후 1946년 향리에서 ‘시문학구락부’ 발족, 1947년 동인지 출간, 이호우와 영남시조문학회 창립, 1992년 한국 시조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시조인협회 고문직을 했고 3000개 이상의 시를 지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제5회 육당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만해시문학상, 육사문학상, 유심특별상, 현대 불교 문학상, 백자예술상, 이설주 문학상 등을 받는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의 살아 생전 모습. (제공: 김천시) ⓒ천지일보 2019.5.1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의 살아 생전 모습. (제공: 김천시) ⓒ천지일보 2019.5.1

◆백수 정완영의 시 세계

백수 정완영은 1960년대 초 청마 유치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으며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 그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시조는 말로만 쓰는 시가 아니라, 말과 말의 행간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는 시와 내가 심고 갈 묵언은 먼 후일 어떤 모습으로 하늘 아래 나설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생각으로 창작에 대한 욕구가 높았다. 하지만 여느 작가들만큼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글을 쓰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수의 독특한 문학세계도 주목할 만하다. 작품 밑바탕에는 유·불·선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작품 상당수가 세상을 관조하는 느낌이라는 평가다. 이는 백수가 시조 시인이라는 길만 걸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시는 미쳐야 쓸 수 있다”며 “시조는 격이 떨어지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산문이 된다”고 강조했다.

◆고향인 김천시를 사랑한 시인

그는 극락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소년기와 결혼하면서 잠시 다른 지역에 있었지만, 서울로 이거 하기까지 약 50여년을 고향에서 생활했다. 문학에 대한 애정 하나로 모든 걸 이겨낸 그는 작품 곳곳마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선생의 제1 시집과 제2 시집을 펴낸 곳을 황악산하, 황악산방이라고 적고 있으며 서울에서 펴낸 제3 시집에서도 “황악산의 시인으로 살고 싶다”고 토로한다. 그는 김천시를 떠나 30여년을 타향에서 살아도 가슴에는 늘 고향을 품고 있었다.

백수의 고향 사랑은 호를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호를 살펴보면 ‘백수(白水)’인데 이는 김천(金泉)의 천(泉)자를 파자해서 만든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향을 본인의 분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백수 선생의 황악산 직지사 사랑은 유별나다. ‘황악산 쇠북소리’는 90을 넘긴 나이에도 계속된 창작열을 보여준 작품이다. 또 직지사와 고향, 김천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많다. 김천시 부곡동에 있는 시민탑에는 백수 선생의 글이 있다. 김천사랑의 대표적인 시 ‘고향 생각’이 김천 남산공원에 시비로 남아있으며 충혼탑에도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특히 ‘직지사 운(韻)’은 직지사 초입에 있는 시비로 묵직하게 와닿는 시로 유명하다. 시인의 고향 사랑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아 고향 바라기로 불렸다고 한다.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새싹이 자라나는 봄날, 오직 시조시 외길을 걸어온 백수 정완영 선생의 삶이 곳곳에 묻어난 김천시와 직지사 자연을 배경으로 있는 백수 문학관은 언제나 방문객을 반갑게 맞을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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