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섬감옥’으로 개소됐다.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인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천지일보 2019.4.29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섬감옥’으로 개소됐다.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인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천지일보 2019.4.29

독립운동 상징 서대문형무소

감옥부터 사형장까지 보존돼

독립 열망, 의지 느낄 수 있어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임정) 100주년이다. 100년을 맞는 만큼 그 역사의 시간을 되짚어 보고 새로운 100년을 설계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시민들의 역사순례 기행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서울에서도 3.1운동, 임정 100년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경찰에 의해 수감됐던 곳, 서대문형무소(사적 제324호)다.

기자는 환한 봄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지난 12일, 독립운동가를 감금하고 탄압하던 곳에서 이제는 대한민국 자주독립의 상징이 된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서대문형무소는 서울역에서 차를 타고 20분,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1분정도 걸으면 바로 앞에 있다. 어른 3000원, 청소년·군인은 1500원의 입장료를 내면 관람할 수 있다. 삼일절과 광복절 및 순국선열의 날에는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섬감옥’으로 개소됐다.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인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순국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독재 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돼 고난을 치뤘던 곳이다.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활용하다 허물 예정이었던 걸 민족 탄압의 증거로서 보존해 후대에 알리자는 명목으로 문화재청이 1988년 2월 27일 국가사적으로 지정했다. 이후 서대문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라는 정식 명칭 하에 역사 공원으로 만들었다.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한 외국인 관람객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내 전체 미니어처 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29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한 외국인 관람객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전체 미니어처 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29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안내서를 보면 본 전시관을 비롯해 중앙사, 옥사(9~12), 공작사,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취사장 등으로 구성돼있다. 맨 처음으로 둘러봐야 할 곳이 전시관이라는 말에 우선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내부에 들어서면 역사관으로 개관하기까지의 과정과 연대별로 구성해놓은 독립운동사를 사진과 글로 만나볼 수 있다. 이 중 서대문형무소의 전체모습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미니어처를 보면 감옥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부채꼴 모양이다. 형무소를 둘러 끝이 없는 담장이 있고 이와 함께 감시초소가 있다.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지금 남아 있는 부지의 3배가 넘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였을까 감도 오지 않았다.

전시관엔 이 외에도 실제 수감자들에게 사용됐던 수갑, 족쇄, 용수 등의 수형도구가 전시돼 있다. 수형 도구 중 ‘요’도 볼 수 있었는데 수감자가 노역시에 탈주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리에 채웠던 것이라 한다. 약 5kg에 달하는 쇳덩이를 허리에 메고 수감자들은 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수감자 이동이나 노역 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양쪽 발목에 채웠던 형구인 족쇄. ⓒ천지일보 2019.4.29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수감자 이동이나 노역 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양쪽 발목에 채웠던 형구인 족쇄. ⓒ천지일보 2019.4.29

특히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순국했던 공간인 ‘9번 사형장’도 재현돼있다. 낮은 천장 한쪽엔 뻥 뚫린 천장 위로 교수형에 사용된 밧줄이 걸려있고, 그 옆엔 위에서 내려오는 나무 계단이 있다. 사형이 집행된 후 간수가 계단으로 내려와 이미 숨을 거둔 시신을 확인하고 목에 묶인 밧줄을 풀고 수습하기 위한 곳인 셈이다. 유난히 컴컴하고 어두웠던 그곳은 모형임을 알면서도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한쪽벽면엔 그곳에서 희생당한 독립투사들의 영정이 걸려있다. 왠지 모를 서러움을 줬다. 참고로 건물 내의 모형으로 있는 사형장은 실제 외부에 있는 실제 사형장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2층 벽면에 전시돼 있는 독립투사들의 수형기록표, 시민들이 꼼꼼하고 차분하게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29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2층 벽면에 전시돼 있는 독립투사들의 수형기록표, 시민들이 꼼꼼하고 차분하게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29

2층을 올라가보면 당시 수감됐던 독립투사들의 수형기록표로 이뤄진 방이 나온다. 앳된 얼굴의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하다. 이곳에선 유관순 열사와 안창호 선생의 수형기록표도 찾을 수 있었다. 고초의 흔적이 역력함에도 무덤덤한 표정들에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보였다. 숙연함을 넘어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음엔 지하로 내려갔다. 음습한 공기와 고문의 흔적이 느껴서 스산한 느낌을 줬다. 지하엔 취조실과 고문실, 독방, 벽관 등 공간이 재현돼있다. 이곳에서 벌어진 고문의 종류는 다양했는데 물고문, 바늘고문 등 그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일제는 취조 전 수감자로 임시로 잠시 구금했던 임시구금실과 취조실을 가까이 두어 취조실에서 동료가 고문으로 고통 받는 비명 소리를 듣게 해 공포를 극대화 시켰다고 한다.

이곳에선 당시 고문을 당하셨던 생존 독립운동가분들의 육성을 통해 식민통치의 끔찍했던 상황을 들을 수 있는 영상도 만날 수 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쯤은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는 한 열사의 음성이 마음을 울렸다. 어느새 전시관에 끝에 다다라 보니 밖으로 연결된 계단이 나왔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나와 맞는 한줄기 빛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 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독립투사들이 고문을 마치고 투옥됐던 옥사다. 2층으로 구성된 옥사는 1층까지만 출입이 허용됐다. 화장실도 없으며 수용인원이 넘쳐서 좁은 방에서 30명씩 지내야 해 돌아가면서 잠을 자야 했다. 이뿐 아니라 이곳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은 늘 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지하에 재현된 임시구금실의 모습. ⓒ천지일보 2019.4.29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지하에 재현된 임시구금실의 모습. ⓒ천지일보 2019.4.29

실제 김구가 쓴 백범 일지에 따르면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매고 노역을 했고,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 발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도 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복을 향한 이들의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가 벌인 옥중 만세운동 등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옥사를 나와 담장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9번 사형장이 보존돼 있는데 그 앞에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가장 키가 크고 유명한 ‘미루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로 끌려온 애국지사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원통함에 울었다고 한다. 그런 통곡이 겹겹이 쌓이며 그 나무에는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와 반대로 같은 시기에 사형장 내 심었던 ‘사형장 미루나무’는 2017년 봄에 고사했다. 이를 사람들은 순국선열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현재 보존을 위해 지지대가 설치돼있다.

그 다음으로는 유관순 열사가 숨을 거뒀다고 전해지는 ‘여옥사’에 들어섰다. 실제로 옛날 여옥사의 초기 설계도를 발견해 2011년 원형대로 복원해서 지었다고 한다. 한발 턱 내딛으니 싸늘함이 느껴졌다. 이 곳 8번방에 바로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모진 고문으로 숨을 거둔 것도 바로 이곳 8번방이라 하니 보고만 있어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또 다른 방에는 여자 독립투사들의 사진과 이름 등 간단한 프로필이 걸려있다. 이 가운데선 출산한 여성 독립투사도 볼 수 있다. 여성들이기에 때로는 임신한 채 수감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보석을 얻어 출산을 외부에서 하고 다시 수감돼 신생아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가능했다.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됐던 여성독립운동가 8인의 모습. ⓒ천지일보 2019.4.29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됐던 여성독립운동가 8인의 모습. ⓒ천지일보 2019.4.29

이 외에도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수감자들이 운동을 했던 격벽장, 나병환자를 수용했던 한센병사, 노역장 등도 볼 수 있다. 3.1과 임정수립 100년을 맞는 올해가 가기 전 서대문형무소를 한번쯤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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