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인 지하철. 그 노선을 따라가 보면 곳곳에 역사가 숨어있다.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주위에 퍼져있고, 한양의 시장 모습은 종로를 거닐며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지하철역은 역사의 교차로가 되고, 깊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와 관련, 켜켜이 쌓여있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지하철 노선별로 떠나볼 수 있도록 역사 여행지를 내·외국인에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봄비 내리는 서울 종로구 덕수궁 돌담길을 우산을 쓴 한 시민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천지일보DB
봄비 내리는 서울 종로구 덕수궁 돌담길을 우산을 쓴 한 시민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천지일보DB

‘이별 속설’에도 데이트 명소로
노래 소재 인기, 외국인도 찾아

도심 한복판 남겨진 ‘덕수궁’
왕실 도서관, 비운의 장소 돼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비내리는 덕수궁 돌담장길을 / 우산 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비내리는 돌담길에 기대어 한 사내는 울고 있었다. 그는 왜 우는 걸까. 1961년 한 작사가는 이런 고민을 시작으로 이 노래 ‘덕수궁 돌담길’을 지었다.

거대한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은 지하철 시청역(1·2호선) 앞. 오가는 차들로 복잡한 이곳에 여유 한모금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다.

‘정동길’로도 유명한 이길에 들어서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봄이면 연두빛이 살아나고 여름이면 하늘을 뒤덮일 정도로 가로수 그늘이 이어지는 이 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길이기도 하다.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덕수궁 돌담길이 갖는 느낌 때문인지 연인의 발길이 이어지는 이곳은 노래의 소재로도 많이 쓰인다. 그 유명세로 한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이 길을 궁금해 한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주한 영국대사관의 점유로 지난 60여년 간 막혀 있던 덕수궁 돌담길의 70m 구간이 전면 개방된 가운데 시민들이 7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 개방 구간을 지나고 있다. ⓒ천지일보2018.12.07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주한 영국대사관의 점유로 지난 60여년 간 막혀 있던 덕수궁 돌담길의 70m 구간이 전면 개방된 가운데 시민들이 7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 개방 구간을 지나고 있다. ⓒ천지일보2018.12.07

◆근현대가 살아있는 길  

이곳 일대는 조선시대 이후 근대 서울의 역사가 남아있다. 덕분에 마치 살아 있는 박물관과 같다. 서울 한복판에 궁궐이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비록 일제의 수난으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으나, 그 시절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돌담길은 원래 덕수궁의 일부였다. 외각길로 여겨진 것은 1922년 일제가 덕수궁 서쪽에 있던 선원전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면서부터다. 일제에 의해 몰락해 가던 왕조를 이끈 고종이 살았던 덕수궁. 원래는 경운궁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던 정궁이었다. 덕수궁은 월산대군이 살던 양반집이 었다.

덕수궁 중화전ⓒ천지일보DB
덕수궁 중화전ⓒ천지일보DB

월산대군은 세조의 큰손자이자, 성종의 친형이었다. 지혜가 뛰어나 세조의 사랑을 듬뿍받은 장자였지만 몸이 약해 왕위계승에서는 밀려났다.

‘추강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

조선의 마지막을 예측하기라도 한 걸까. 찬 물결, 무심한 달빛, 텅 빈 배는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다.

궁궐로서의 기능은 이미 1500년대 후반부터 예고된 듯 보인다.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 이후 도성 안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피난갔던 선조 일행은 한양으로 환도했으나 왕이 머물 궁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때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았으니 이때부터 궁궐로서 역할을 하게 됐다.

비좁은 행궁에서 16년을 살다가 창덕궁으로 환어하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은 선조. 이후 왕위를 계승한 광해군은 행궁의 서청(오늘날의 즉조당)에 머물다가 창덕궁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이 행궁을 경운궁으로 불렀다. 이곳은 고종이 양위할 때까지 297년간 사용된다.

덕수궁 석조전ⓒ천지일보DB
덕수궁 석조전ⓒ천지일보DB

◆덕수궁 뒤엔 왕실도서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 주변을 돌다보면 작은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서양집 벽돌로 된 ‘중명전’이 있다.

덕수궁의 왕실 도서관으로 지어졌다가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된 곳이다. 이 건물 역시 원래 덕수궁 안에 있었다.

이곳은 비운의 장소로도 기억된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후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맺어졌다. 그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전각이기도 하다. 특사는 결국 실패하고 이를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켰다.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죽고 외세의 세력이 너무 거세진 이때,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고종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60년 만에 전면 개방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떠올리는 역사는 마치 그 시절 소리 내지 못하고 통곡해야만 했던 대한제국의 한(恨)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듯 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