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대경 인턴기자] 서울 중구 평화시장에 있는 전태일 동상. ⓒ천지일보 2019.3.20
[천지일보=이대경 인턴기자] 서울 중구 평화시장에 있는 전태일 동상. ⓒ천지일보 2019.3.20

봉제공장에 미싱 보조로 취직

근로기준법 독학… 현실 자각

평화시장 최초 노동운동 조직

[천지일보=이대경 인턴기자]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1970년대 열악했던 노동자의 삶과 시대의 아픔을 담은 노래 ‘사계(거북이 1집)’의 가사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봉제공장 중 한 곳은 ‘평화시장’. 그 가운데 ‘청년 전태일’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지 49년이 흐른 올해 ‘전태일 기념관’이 문을 열면서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전 열사는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전 열사의 가족은 서울에 올라와 염천교 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동냥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는 17세가 되던 1965년 평화시장의 봉제공장 삼일사에 ‘시다(수습생)’로 취직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미싱 기술 덕분에 미싱 보조를 거쳐 1966년 가을 통일사에 미싱사로 전직을 했다.

당시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12~13세의 여공들은 일당으로 커피 한 잔 값인 50~70원을 받으며 14시간 이상을 일했다. 전 열사는 여공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폐렴 등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며 노동환경 개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천지일보=이대경 인턴기자]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구)평화시장과 신 평화시장. ⓒ천지일보 2019.3.20
[천지일보=이대경 인턴기자]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구)평화시장과 신 평화시장. ⓒ천지일보 2019.3.20

◆바보회 창립해 노동운동 전개

전 열사는 근로기준법 관련된 내용을 독학하려 했지만 전문이 한자로 돼 있어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을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전 열사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같은 동네에 살았던 ‘광식이 아저씨’라 불리는 나이 든 대학생을 찾아가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해설서 한 페이지를 읽으면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전 열사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한다.

전 열사는 바보회를 통해 당시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봉제공장주들은 그를 해고시키고 평화시장에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전 열사는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근로기준법 준수” 외치며 불길 속으로

1970년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 열사는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해 삼동친목회를 조직,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선다. 하지만 여전히 봉제공장주들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에도 근로기준법은 있었지만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감독관청조차도 이를 전혀 지키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전 열사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알리기로 결심한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이 집회를 연 가운데 당시 22세였던 전 열사는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친구에게 불을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전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불길에 휩싸였다. 그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뒀다.

전태일 열사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 (출처: 전태일 재단 홈페이지) ⓒ천지일보 2019.3.20
전태일 열사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 (출처: 전태일 재단 홈페이지) ⓒ천지일보 2019.3.20

◆2500여개 노조 설립 계기 만들어

전 열사의 사망 이후 1970년대에만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결성됐다. 그의 죽음은 19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1973년 신진자동차, 원풍모방, 동일방직,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노조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지식인과 대학생으로 하여금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독재를 타도하는 것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도 바꿔야 함을 인식하게 했다.

지식인과 대학생은 노동자와 도시 빈민 등의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의 권리 의식을 고취하는 등 활동을 진행했다. 또 공단에 취업해 노동조합 조직을 시도하기도 했다.

◆“49년 지나도 열악한 노동환경 여전”

우리나라의 노동 환경은 ▲2016년 기준 OECD 가입국 중 최장근로시간(1년 2052시간) ▲2017년 기준 노조조직률 10.7% ▲2017년 기준 전체 노동자의 33% 비정규직 ▲산재 사망률 1위 등 여전히 개선할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당시와 비교하면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아직도 노동자의 인간다운 기본권리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노 소장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7%로 낮은 수치”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노사가 협의할 때 대등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헌법에 보장된 노조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며 “이를 법제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 소장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저임금 노동자의 처우개선 ▲장시간 노동문제 해결 ▲특수고용노동자와 일시적 계약 관계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 보장 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천지일보=이대경 인턴기자] 전태일 동상 주변 보도블럭에 새겨진 시민의 글. ⓒ천지일보 2019.3.20
[천지일보=이대경 인턴기자] 전태일 동상 주변 보도블럭에 새겨진 시민의 글. ⓒ천지일보 20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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