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19.2.28
전시실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19.2.28

‘독립운동의 힘, 한글’ 테마展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글은 우리 문화생활의 유일한 도구요, 무기이다.”

‘농민(農民)’ 제4권에 담긴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장을 지낸 이극로(李克魯, 1893~1987)의 글이다. 일제강점기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나라. 우리의 말과 문화를 없애려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한글은 목숨과도 같았다. 조선어학회 소속의 국어학자들은 어떻게 우리말을 지키고자한 것일까.

◆우리 말글 체계 세워가

1894년 한글은 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고종의 칙령(1894년)에 따르면,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동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말글의 규범이 없었기 때문에 한글 표기에 혼란이 있었다. 1907년 학부 내에 한글 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치되고 주시경 등 연구위원들은 1909년 한글 표기법 통일안인 ‘국문연구의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표기법 통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의 압박과 탄압에도 국어학자와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말을 지키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1919년 3.1운동 이후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주시경의 제자들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자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했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우리말글의 규범을 제정하고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의 체계를 세우고 보급했다.

한글은 독립운동의 힘이 되기도 했다. 일제는 1938년부터 우리말 교육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1942년에는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같은 고초와 수난 속에서 한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나라를 찾으려는 원동력이자 구심점이 됐다.

1907년에 결성된 조선언문회 활동을 기록한 '한글모죽보기'ⓒ천지일보 2019.2.28
1907년에 결성된 조선언문회 활동을 기록한 '한글모죽보기'ⓒ천지일보 2019.2.28

◆‘한글’이라는 명칭 최초 기록

1446년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언제부터 ‘한글’로 불렀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한글’이라는 명칭은 ‘한글모죽보기’에 기록된 ‘배달말글몯음’을 ‘한글모’로 바꿨다는 설명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한글모죽보기’는 국어학자 이규영(李圭榮, 1890~1920)이 1907년에 결성된 조선언문회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언문회는 1911년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3년에 ‘한글모’로 다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목숨과도 같았다.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대표적인 국어학자 최현배(崔賢培, 1894~1970)는 1930년대 한 음식점 방명록인 금서집(錦書集, 외솔기념관 소장)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친필을 남겼다. 어떤 상황에서 이 글을 썼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문구는 한글을 지키고자했던 간절했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우리 말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26년 조선어연구회의 주도로 처음 ‘가갸날’을 제정됐다. 1928년에는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국립한글박물관의 ‘독립운동의 힘, 한글’ 테마전은 상설전시실에서 6월 30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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