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길 국가상징물연구가
김원길 국가상징물연구가

신림은 원주의 동남쪽지역이라 옛 원주의 관아에서 평창, 영월을 거쳐 영동지방과 제천 등 충북 북부지역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장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발행된 원주읍지에는 단구역서 가리파재를 넘어 신림역과의 거리는 40리이다. 신림역에는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과 짐을 실을 수 있는 말 목마 3필과 노비 31명이 있었다.

가리파재 인접한 백운산 줄기 이재와 찰방망이, 옛날 관행길 예찬이 강안이, 역골, 또는 조선시대 군량을 저장한 창고가 있었다는 둔창, 신림으로 이어진다. 신림은 구을파면, 1895년 가리파면, 일제강점기던 1916년 귀신숲 서낭당 맑은정신의 신림리가 중앙이라 신림면으로 개칭돼 현재에 이른다. 필자는 보은고장 보다는 보은정신 고장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치악산과 백운산을 갈라놓아 온폭하게 들어간 곳이 가리파재이다. 이곳 잿말랑이 당집 옆에는 치악산백운산 성황계비와 성황당 유래비 2개가 있다. 비문에는 1897년 민간인으로 조직된 보부상들이 행상의 안전과 상인들의 결속을 목적으로 양대 산신령에게 치성과 장사 길의 안전을 위해 보부상들로 계를 조직해 130년간 지속됨은 아주 특별하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을 합친 말로 봇짐장수 보상과 등짐장수 부상으로 봇짐과 등짐을 지고 지방을 자유로이 다니며 가격을 민주적 흥정을 통해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다. 고대부터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달된다. 이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설립 후 국가간 관세의 장벽을 허물은 자유무역협정(FTA)의 모태며 세계 시장경제의 원조이다.

고종 25년인 1888년에 상리국 소속의 보부상단에서 당전을 사들여 성황당을 운영케하여 보부상이 묵을 숙식소를 마련해 편의제공과 단합을 꾀한다. 보부상이 늘자 당전에는 숙소뿐 아니라 우마 칸을 확장해 상인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가리파재 성황계 문서는 1888년 11월 제작된 절목, 원주우지사 인장과 도장함, 문서함, 시대미상과 1920~37년 작성 추정되는 계원명단 등 11건 17점의 산신제 민간 계문서를 발견한다.

비석에는 피성옥 등 410명의 지난날 계원의 명단이 수록돼 있다. 계문서 명단은 성명과 지역이 표기되었는데 국내뿐 아니라 바다 건너 청나라 사람, 서울 길로 경기 여주, 양평, 양주, 동부 평창, 정선, 양양, 남부 제천, 충주, 경북 칠곡, 대구, 경남 거창, 제주 계원도 있다. 계원은 신림분이 70%로 조부와 부가 있고, 필자는 현계원으로 3대 소유토지 등기자였다.

이 산신제 계문서는 전국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유일한 민간 사료로 역사적인 연구가치의 충분과 귀하고 소중하다. 보부상들이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상업활동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각국들과 자유무역협정을 통해서 세계 10위권의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한 원조이다. 또한 신림마지들은 “잘살아 보세로 시작”한 전국 최초로 1964년 7월 농촌근대화 기반산업인 농업용지하수 개발의 기계화시험은 민족 5천년 보릿고개 극복효시의 역사적 장소이다.

따라서 신림은 치악산 상원사 궝의 보은정신과 가리파재 계문서의 자유민주적 시장경제의 원조, 마지들의 보릿고개 5천년 극복효시 등 보은정신과 물질문명으로 대변된다. 이의 관광자원화로 가리파재서 치악산 상원사 간과 백운산 이재 간에 케이블카 설치가 필요하다. 아울러 자유민주적 시장경제의 원조 보부상재현장 설치과 농업용지하수 관정복원, 보릿고개극복 박물관 조성 등 가리파재 일원의 관광자원화는 ‘새 5천년 자유민주적 민족통일 관문’이 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