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된다. 역사는 미래를 바라볼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겨진 유물은 그 당시 상황을 말해 주며 후대에 전해진다. 이 같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을 보관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장소가 박물관이다. 이와 관련, ‘이달에 만나본 박물관’ 연재 기사를 통해 박물관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다양한 탈의 모습 ⓒ천지일보 2019.2.18
탈박물관에 전시된 다양한 탈의 모습 ⓒ천지일보 2019.2.18

경남 고성탈박물관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역사
신앙탈에서 예능탈로 발전
“신과 인간의 거리 좁혀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탈(頉)이 난다, 탈놀이, 탈춤….’

우리는 ‘탈’ 하면 얼굴에 쓰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탈’이 들어간 단어가 꽤 많다. 또 발에 씌우는 발탈이나, 장군탈처럼 신의 모습을 뜻하는 탈도 있다. 다시 말하면, 얼굴에 쓰는 것은 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이란 무엇이고, 얼마나 긴 시간 탈이 전해져 내려온 것일까.

◆우리나라 탈 역사

탈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 시작된다. 과거에는 모든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주술의 힘을 빌려 악령을 물리치고자 했다. 탈도 주술 중 하나였다.

오혜숙 경상남도 문화관광해설사는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조개탈은 기원전 5천년쯤 신석기 시대에 이미 탈의 형태가 있었음을 알려준다”며 “이 탈은 작은 조개껍질에 구멍을 뚫어서 두 개의 눈과 하나의 입을 표현했으며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주로 암각화에서 탈을 쓴 인물이나 탈이 등장한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에서 탈을 쓴 기록이나 흔적이 보인다.

이도열 고성탈박물관장이 제작한 탈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2.18
이도열 고성탈박물관장이 제작한 탈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2.18

신라의 처용탈은 원래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을 쫓는 부적의 기능을 하는 ‘벽사탈’이지만 이후 처용무에 사용되면서 예능적인 기능을 포함하게 됐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와 연례 때 벌어졌으며,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이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설화’에서 비롯돼 궁중에서 좋지 못한 귀신을 쫓는 나례의 중심 의식무가 됐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적인 큰 행사에서 처용무를 포함한 다양한 산대잡극이 연희됐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했지만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의식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서서히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산대잡극과 나례 쪽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겪었다. 산대나희는 풍요를 기리고 귀신을 쫓는 나례로써,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관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도감패’들은 뿔뿔이 흩어져 차츰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 산대놀이의 광대들은 주거지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놀이패를 조직해 오늘날까지 그 맥을 전승해 내고 있다.

고성탈박물관에 전시된 박탈 ⓒ천지일보 2019.2.18
고성탈박물관에 전시된 박탈 ⓒ천지일보 2019.2.18
◆고성오광대놀이란

탈은 크게 ‘신앙(信仰)탈’과 ‘예능(藝能)탈’ 즉, 두 가지로 나뉜다. 천재지변이 무쌍한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신앙탈이 먼저 생겨났다. 신앙탈은 신성(晨星)탈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무용과 재담이 더해져 예능탈로 발전했다. 예능탈은 탈춤을 쓰고 춤추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산대놀이, 황해도에서는 탈춤, 경남의 낙동강 동쪽 지역에서는 야류(野遊), 낙동강 서쪽에서는 오광대(五廣大)라고 불렀다. 고성오광대는 경남 고성에서 전승돼 온 탈놀음으로,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7호로 지정됐다.

오광대란 놀이 과장 중에서 다섯 광대가 등장하는 것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방위(오방)를 상징하는 다섯 광대가 나와서 하는 놀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남 일대에 오광대놀이가 전승되는 곳은 거의 십여 곳에 이른다.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다섯 가지뿐이다.

이 중 고성오광대는 그 전파 시기가 대체로 늦은 편이다. 19세기 중엽이라고도 하고 20세기 초라는 설도 있다. 탈은 원래 오동나무로 만들었으나 한일합방 후 나라 잃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강이나 바다로 띄워 보냈다고 한다. 이후 종이로 만든 탈을 만들어 사용했고 오늘날에는 다시 나무 탈을 만들어 함께 사용하고 있다.

고성탈박물관 외관 ⓒ천지일보 2019.2.18
고성탈박물관 외관 ⓒ천지일보 2019.2.18

◆탈로 해탈 경지 이르러

그렇다면 탈은 쓰는 용도의 것으로만 이해해야 할까. 이도열 고성탈박물관장은 “탈이라는 것은 ‘탈이 나다, 탈을 내다’ 할 때 ‘탈’, 다시 말해 질병이나 나쁜 잡신을 포함해 자기의 행복이나 희망을 방해하는 것들 등 탈이 나는 것을 모두 막아 주는 게 탈이다. 이게 탈이 갖는 ‘이중성’”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시대마다 등장한 고인돌·암각화·장승 등은 이름과 모양은 달랐지만 액과 탈을 막는 의미는 동일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탈(頉)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며 “결국 탈은 인간과 신의 거리를 좁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역사가 발전하듯 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좀 더 발전적인 면에서 탈이 계승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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