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사복시 관리 1904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9.2.15
사복시 관리 1904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9.2.15

사복시 관리 1904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수레, 말, 마구, 목장을 맡아보던 관청을 사복시(司僕寺)라고 한다. 서울 종로소방서 근처 길가에는 조선시대 당시 ‘사복시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여기에 있던 사복시는 외사복시로 1907년 폐지됐다. 당시 사복시 관원의 종들을 ‘거덜’이라고 불렸는데 말을 돌보고 관리하는 일을 했으며, 높은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는 길을 틔우는 일도 했다.

사복시의 으뜸 벼슬로는 제조가 있지만, 실질적인 수장은 정3품 사복시정(司讓寺正)이다. 내사복(內司僕)의 내승(內乘)을 겸해 임금의 가마와 외양간과 목장을 맡아 보았다. 궁중에서 쓰는 마필과 가마 등을 다루는 내사복(內司僕)의 관원을 내승이라 한다.

사진 속 말을 타고 가는 관리 앞에 서양식 군악대 모습이 보인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진 후 ‘동호수(銅號手)’라는 서양식 신호 나팔수가 편성됐으며, 이후 군제개편과 함께 나팔수-곡호수-곡호대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전 부대에 확대, 편성됐다. 1888년에 설치된 곡호대는 군악대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지방 부대에 이르는 전군에까지 곡호대 편성이 확대돼 양악 편성의 군악대가 신속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돈의문 앞 친위대 1903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천지일보 2019.2.15
돈의문 앞 친위대 1903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천지일보 2019.2.15

돈의문 앞 친위대 1903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에 있었던 조선시대 서울 성곽의 4대문 중 하나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안쪽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앞쪽으로 친위대 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돼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조선 말기 왕궁의 경비를 담당했던 중앙군이었던 친위대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에 의해 군제개혁의 명목 아래 1905년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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