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문화마을 전경. ⓒ천지일보 2019.1.25
감천문화마을 전경. ⓒ천지일보 2019.1.25

가난했던 시절, 신앙촌으로 시작

민둥산 비탈면에 줄줄이 세운 집

‘기차마을’ ‘블록마을’ 별칭 붙기도

보존·재생 모토로 주민참여 발전

[천지일보=김수희 기자] 그리스에는 하얀 골목, 파란 교회당, 담장너머 광활한 바닷가의 풍경을 지닌 에게 해의 ‘빛에 씻긴 섬’ 산토리니가 있다. 국내에도 산토리니 부럽지 않은 마을이 있다. 그곳은 바로 ‘한국의 산토리니’로 불리는 부산 사하구에 위치한 감천문화마을. 이 마을은 부산의 관광명소로 이미 유명한 곳이다.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에는 이곳을 방문한 후기가 차고 넘친다. 이를 방증이나 하려는 듯 평일, 휴일 할 것 없이 가족·친구·연인 등 수많은 관광객들이 마을로 찾아들고, 시내와 마을을 잇는 몇 대 되지 않는 버스에는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이 가득하기 일쑤다. 지난해 감천문화마을을 찾은 사람은 무려 257만명에 달한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예쁜 마을 풍경 속에서 ‘인생샷’을 건지거나 어딘가를 방문해 추억을 쌓았다는 즐거움만을 안고 돌아가기 마련이다. 감천문화마을이 품고 있는 사연에 관심을 갖는 이는 드물다. 하루에도 수백명의 관광객을 품어내는 감천문화마을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감천문화마을의 시작

감천동에 마을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955년. 한국전쟁이 휴전하고 2년이 흐른 뒤였다. 먹을 게 없어 나무껍질이나 진흙을 먹었고 그로 인해 생긴 변비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생길 만큼 먹고 살기 힘겨웠던 시절에 마을은 지어지기 시작했다.

1950년대 지어지고 있는 태극마을 모습. (제공: 태극도) ⓒ천지일보 2019.1.25
1950년대 지어지고 있는 태극마을 모습. (제공: 태극도) ⓒ천지일보 2019.1.25

이 마을의 시작은 신앙촌이었다. 전국의 태극도 신도들이 한국전쟁 당시 부산 보수동 등에 터를 잡고 피난생활을 해왔다. 그러던 중에 부산시는 화재 등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보수동 판자촌을 변두리로 이주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당시 판자촌은 불이라도 나면 전소되기 일쑤여서 큰 피해를 불러왔다. 실제로 국제시장이나 부산역에 큰 불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이주한 태극도 신도들이 초기 감천문화마을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마을은 처음에 태극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천마산과 옥녀봉 사이의 비탈면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800여가구 4000명 규모였다. 태극도 도주는 집을 지을 당시 ‘아랫집이 윗집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내걸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감천마을의 집들에서는 빠짐없이 햇볕이 잘 들어오는 모습을 지금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로 인해서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엔 그늘이 지는 모습을 생각하면 꽤나 계획도시적 면모를 갖춘 마을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힘든 시간을 살아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도 생각해볼 수 있다.

계획도시적 면모는 구획을 나눠주는 ‘계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감천마을은 9개의 감(甘)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이를 구분하기 위해 6m 정도의 계단을 활용했다. 지금은 집을 짓는 과정에서 점점 좁아져 2m 정도 남아있다. 이러한 계단은 구획을 나눠주는 동시에 화재 시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방화선의 역할도 했다. 또 감천마을의 길들은 막힘없이 이곳저곳으로 이어져있어 넓진 않지만 이동에 편리하기도 하다.

초기 태극마을 모습. (제공: 태극도) ⓒ천지일보 2019.1.25
초기 태극마을 모습. (제공: 태극도) ⓒ천지일보 2019.1.25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나무도 많지 않았던 민둥산 비탈면에는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집이 지어졌다. 지금도 시골에서 김장을 할 때면 집집마다 품앗이를 해주는 것처럼 당시 집을 지을 때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했다. 당시 줄줄이 이어져 지어진 집들을 보고 사람들은 ‘기차마을’ 또는 ‘블록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지어진 판잣집은 칸칸이 나뉘어 여러 식구들을 맞았다. 방 한 칸에 평균 20㎡(6평)였다. 이 방 한 칸에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손자, 손녀들까지 3대가 함께 살았다. 방과 방, 즉 집과 집 사이를 막아주는 건 얇은 판자 하나밖에 없어 생긴 일화도 참 많을 것이다. 어떤 날 밤에 부부가 이런저런 이유로 큰소리를 내며 싸우면 옆 집에서는 이런 소리를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를 듣던 어르신이 기침소리를 “에헴”하고 내면 머쓱해진 부부의 싸움이 종료되고는 했다는 이야기도 숨어있었다.

태풍이 오기라도 하면 지붕위에는 돌이 하나 둘 얹어졌고 이를 끈으로 묶어서 밤새 손에 쥐고 잤다. 장마철 비가 세차게 오는 날이면 여기저기 새는 빗물을 받기 위한 그릇들이 좁은 방안에 줄줄이 놓이기도 했다.

수도가 없던 시절 주민들은 매일매일 물을 얻기 위해 마을 곳곳에 있는 우물을 찾아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줄을 서 얻은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이고 지고 148개에 이르는 계단을 올랐다. 이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현기증이 생겨 별이 보인다고 해서 ‘별이 보이는 계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금은 이 계단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들의 모습이 그림으로 담겨있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아침이면 공중화장실에 줄을 서 발을 동동 구르기 일쑤였다. 지금도 마을엔 사람이 살고 있지만 화장실이 없는 집이 남아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결혼도 하고 잔치도 해야 했다. 없는 살림에 궁색이나마 갖추기 위해 집집마다 숟가락·젓가락·그릇·접시 등과 같은 살림살이도 식재료도 조금씩 내놓으며 마음을 모았다. 양동이를 한 번 돌리면 계란, 밀가루, 채소 등이 가득해져 돌아왔다. 손님들이 모여들면 주변 집들은 손님이 머물 방도 잠시 내어주곤 했다.

감천문화마을 입구 근방에 위치한 작품의 모습. ⓒ천지일보 2019.1.25
감천문화마을 입구 근방에 위치한 작품의 모습. ⓒ천지일보 2019.1.25

◆한국의 산토리니로 변화하다

감천2동에 해당하는 감천문화마을의 인구는 한때 5400가구 3만여명에 이르기도 했지만 도시로 떠나가는 사람이 늘자 1만명이 됐고 빈집도 늘어났다.

그러던 중 2007년쯤부터 사진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 마을은 영화 촬영지로도 활용됐다. 2007년 당시 재개발 논의가 있었으나 거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던 중 2009년 한 교수가 감천문화마을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마음에 문화체육관광부 마을미술프로젝트 응모를 하게 된다. 9000만원 되는 상금으로 마을 주민이 주최가 돼 전문가, 부산시의 도움으로 초기 10점의 작품을 마을 입구에 배치하게 된다.

초기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주민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문화마을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마을 내 노후 주택을 무상으로 수리해주는 등 주민 복지가 확대된 탓인 듯하다.

그렇게 매해 ‘보존과 재생’을 모토로 발전을 거듭해온 감천문화마을은 주민이 주최가 돼 도시재생을 이뤄낸 좋은 본보기가 됐다. 파스텔 톤의 풍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고 그 안에 아기자기하게 들어선 작품들은 찾는 이에게 수많은 ‘포토 스팟’을 만들어준다. 감천문화마을에 방문하게 된다면 인생샷에만 목을 메고 있을 것이 아니라 마을이 담고 있는 사연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감천문화마을 골목길. ⓒ천지일보 2019.1.25
감천문화마을 골목길. ⓒ천지일보 201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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