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붉게 옷을 갈아입은 가을 산이 부른다. 가을 산이 단풍으로 불탄다. 꽃의 봄, 녹음의 여름, 단풍의 가을, 하얀 눈의 겨울, 사계(四季)는 이렇게 돌고 돌며 바뀌어 계절마다 사람들에게 새 기분과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그런 자연은 우리에게 넘치는 축복이다.

가을 단풍, 파란 하늘이 있어 더욱 예뻐 보이는 가을 단풍은 매혹적이다. 그 매력이 우리를 잡아매어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일상의 밧줄을 풀리게 한다. 기어이 산행에 나서도록 만든다.

멀리 가는 행락의 즐거움도 있어 설악산·내장산으로 도시를 탈출한 인파가 몰려든다. 가을의 쌀쌀함은 우리를 차분하게 해주지만 들뜬 인파는 우리를 덩달아 들뜨게 한다. 꼭 멀리 갈 것도 없다. 가까운 곳에서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단풍의 가을 맛을 만끽할 수가 있다. 남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수락산 관악산 청계산 용마산 아차산 대모산 구룡산, 헤아리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늘 가까이에서 우리를 다정하게 품어주는 고마운 산들이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고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산들이다. 가까이에 있어 그 소중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미처 충분히 못 느끼고 사는 산들이다. 이런 산에 올라 산과 같이 혹여 우리와 가까이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진가를 깨닫게라도 된다면 가을 산행은 그 즐거움과 의미가 배가(倍加)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가을 산행은 그 자체로 즐거울 뿐 아니라 유익한 것이다. 그렇지만 떼로 어울려 웃고 즐기고 먹고 마시고 노래방에 몰려가 한바탕 뛰고 노는 것만으로 끝내 버리는 것은 좀 썰렁하다. 가을 산행은 언 땅에서 생명이 움트고 약동하는 춘삼월의 봄 꽃놀이와는 다르다. 생명의 절정기인 땡볕 여름의 물놀이와도 다르지 않은가.

가을은 뭇 생명의 한 해 일주(一周)가 거의 마무리되는 아쉬운 끝자락이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이 타는 계절이다. 이 불꽃이 타고나면 모든 생명이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겨울이다. 그나마 가을은 우리 곁에 오자마자 겨울에 밀려나기 시작한다. 눈앞을 스치는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자연의 가을은 또 돌아오지만 인생의 가을은 딱 한 번이다. 인생의 가을은 스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과 가을 단풍이 가져다주는 상념(想念)은 즐겁고도 슬프다. 억새의 군무(群舞) 쓸쓸한 언덕에서 강물처럼 흘러간 아지랑이 피는 봄과 땀 흘리던 여름이 되돌아봐 진다.

이른바 가을은 생각하는 계절이고 사색(思索)의 계절이지 야심과 이상이 부푸는 계절은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젊음의 낭만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이 가을이 내 인생의 마지막 가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우수(憂愁)는 깊다. 단풍이 시들어 낙엽 지면 영원한 동면(冬眠)에 드는 겨울이 오지 않는가.

하긴 가을의 이런 측면이 우리의 정신을 각성시킨다. 고무줄처럼 늘이고 줄일 수 없는 시간의 소중함이 절실해지며 방황이나 지나친 놀이, 부질없는 게으름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옛 선비들이 술 마시고 취하기보다 책을 읽는 데 가을의 시간을 아껴 쓰고 그것을 권면(勸勉)했던 까닭이다.

디지털 영상이나 오디오(Audio)에만 매달리는 세태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책 한 권이라도 더 읽어 내면을 살찌운다면 그만큼 더 보람 있는 인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식이 돈이 되는 시대이니 말이다. 가는 세월의 소매 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안타까워하고 우수에 젖기보다 책 한 권이라도 읽으며 가을을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 것인가. 좋은 책은 지식의 보고이며 지성을 밝혀주고 지혜를 풍부하게 해주는 인생의 길잡이가 아닌가.

가을은 떠나는 계절이라지만 돌아와 새 기분, 새 각오로 제자리를 찾는 계절이어야 한다. 허전한 가을에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Gypsy)이기 쉽다. 집시는 인간의 본원적인 ‘자연 상태’의 자유, 영혼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에 방황한다. 공권력이나 사회 질서에 매여 정착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텐트에서 잠을 자며 그러다가 이내 가족이나 부족을 이끌고 어디론가 이동한다.

방석이나 수공예품, 목공예품을 만들어 팔거나 때로는 밀수로 생활을 꾸려 나간다. 타로(Tarot)점을 치고 악기를 잘 다루며 노래를 잘 부른다. 그들도 문화가 있고 오락이 있다. 인간 모두에게 이러한 원초적인 야성(野性)과 영혼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볼 때 우리 모두는 집시다. 사막을 떠도는 베두인(Bedouin)이다. 그런 자유를 꿈꾸며 고민하고 방황하는 집시이며 베두인이다.

가을은 자칫 우리를 집시와 베두인의 생활을 동경하게 하는 과잉 낭만과 감성을 부추기기가 쉽지 않은가.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처럼 살라고 하면 우리는 그렇게 못 살 것이다. 도시로 간 집시가 다시 거친 야생으로 되돌아오듯이 우리가 그들 속에 섞여 산다면 얼마 못 견디고 금방 되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사회적인 질서와 문명에 길들여진 탓인가. 시달리고 부대끼며 머리 터지는 일상이 우리를 꼭 고통이나 슬픔만을 주는 것은 아니어서 그런 것인가. 그 숨 막히는 일상 속에 캐 올려야 할 가치와 보람이 있는 것인가.

어떻다고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돌아올 곳이 있어서 떠나는 것이 행복한 우리가 아닌가. 우리는 가끔은 집시지만 돌아올 곳이 없어 끝없이 방황하는 집시는 아니다. 가을 행락-. 떠도는 집시가 아니라 가볍게 제자리를 찾아 돌아와 든든히 정착하는 행락이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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