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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EU 중심 세계구도 재편… 정책․규제 적응이 관건

[천지일보=송범석 기자] 지난 6일 열린 한·EU 정상회담(벨기에 브뤼셀)에서 양측 정상이 FTA(자유무역협정)에 정식 서명함에 따라 장밋빛 희망과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유럽 27개국으로 구성된 EU는 경제규모가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시장이다. EU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16조 4000억 달러로, 세계 전체 GDP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의 교역액은 지난해 788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교역규모다.

한·EU FTA가 발효되면 양측은 합의 단계에 따라 품목별로 무관세 수출입이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경제 전문가들은 수혜업종과 피해업종을 전망하며 품목별로 특성에 맞는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국제 정세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FTA 이후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는 EU 차원의 정책과 규제에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쇠퇴하고 EU와 중국이 앞서가는 구도로 세계질서가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특히 경제력은 1위지만 국제사회에서 별다른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EU가 국가 간 평화를 기치로 내세우며 세계를 주도해 나갈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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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 맞춤 대비 준비 해야”

우리나라의 경우 이번 FTA 시행으로 유럽에 대한 수출이 늘어나고 양측 간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협력관계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지형 조건과 자원의 한계로 대외 지향적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국이 EU와의 연대를 꾀함으로써 세계를 향해 뻗어나갈 수 있는 호기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동유럽의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무장한 유럽기업의 국제경쟁력이 높아지면 한국 기업이 경쟁 압박을 받을 것이고, 이로 인한 대립도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EU에 대한 정보력과 적응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더 나아가 EU를 통해 남북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주문도 내놓는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은 “우리나라는 IT 전기 전자 분야의 경쟁력이 강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적응력 부족, 취약한 현지 인맥 및 현지정보 수집력, 유럽에 대한 낮은 인지도 등은 약점이 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FTA 체결로 서로 간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 정책내지 법률적 측면에서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발생할 것”이라며 “그런 맥락에서 EU가 영향력을 내세워 일정한 기준을 설정하려고 할 것이고, 우리는 EU의 정책 프로세서에 적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김 실장은 “그간 국내 기업들이 유럽에 수출을 많이 해왔음에도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변 집단의 활동이 미흡했다”고 지적하며 “이번 FTA를 기점으로 단순한 무역이나 투자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교류가 확대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은 EU의 입법과정과 관련된 사전 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고 서로의 제도를 조율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근 계명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미국 중심의 수동적 외교 형태를 벗어나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적극적이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맞이하고 준비해야 한다”면서 “EU라는 틀 안에 있는 개별국가들의 특성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 나라별 전문가도 양성해야 하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전공하는 전문가들도 배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미․일․중․러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 EU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라며 “국제사회에 다양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무성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EU FTA는 ‘연성권력(soft power)’이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의미를 짚었다.

이 교수는 “미국이 최신 무기를 앞세운 군사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안보 증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데 비해 EU는 환경보호나 인권 합리화, 경제 안보 등 연성권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안보를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북통일은 분위기 조성이 중요한데 한국과 EU가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전략적인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면 남북관계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동아시아 평화, EU의 연대에서 답을 찾는다

한편 유럽사(史) 전문가들은 EU 출범이 갖는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선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EU가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EU가 출범한 흐름을 파악하고 관계를 원활하게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조언이다. 더 나아가 EU의 발전을 통해 위태로운 동아시아 외교지형을 개선해 나가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1993년 출범 당시 12개국에 불과했던 EU 가입국은 현재 27개국이며 터키, 크로아티아 등도 가입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EU의 팽창 즉 ‘유럽화’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럽화를 이끈 역사적 기제(機制)를 이해해야 한다.

학자들은 EU의 연원을 중세시대에 유럽에서 발생했던 기독교 국가 간 연대에서 찾는다. 강한 무력을 갖춘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결속을 다졌던 것이 유럽화의 효시가 됐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런 연대 체제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로 인해 사라지고 만다. 이 시기엔 국가와 민족의 중요성을 부르짖는 철학이 사유의 흐름을 지배하면서 유럽인들은 국가만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두 차례 발생한 세계대전은 민족국가에 대한 회의감을 낳게 됐고, 유럽인들은 국가가 주권을 내세워 국민들을 전쟁터에 내몬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통합 운동은 이때부터 수면 위로 올라왔으나, 경제 분야에서의 협력을 넘어서지 않는 매우 한정적인 통합만 이뤄졌다.

하지만 그 이후 발생한 냉전체제가 유럽의 결속을 이끈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통합은 가속화된다. 1947년 당시 미국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를 봉쇄하기 위해 서유럽의 결속을 요구했다. 이에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설립한 데 이어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공산주의의 팽창에 따른 사건으로 판단하고 공동의 군대를 운용하자는 논의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협력체와 논의가 EU의 전신 역할을 했던 유럽공동체(EC)로 이어졌고 2004년엔 경제와 정치 분야의 통합을 넘어 EU에 초국가적 지위를 부여하는 유럽헌법조약을 테이블 위에 올릴 정도로 국가 간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와 관련 노명환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는 “EU는 민족국가 체제에 대한 거부이자 인간들에게 더욱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로 나타난 공동체”라며 “회원국들 간의 대화와 타협으로 정책이 이뤄지고 설립 후 회원국 간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점을 보면 일단 반은 성공한 통합”이라고 평가했다.

노 교수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유럽에서 25년에 한 번씩 전쟁이 일어났다. 곧 평화를 전면에 내세운 EU가 팽창하면서 유럽 내 전쟁이 사라졌다는 평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민족주의는 결국 다른 민족을 업신여기고 짓밟는 전쟁을 일으켰고 승전국이나 패전국이나 모두 피폐해지는 모순을 낳았다”며 “EU는 이런 민족주의의 반성에서 출발한다”고 분석했다.

노 교수는 또한 “갈등이 심한 우리 동아시아가 EU가 전면에 내세운 평화의 기치를 이해했으면 좋겠다”면서 “그들은 그저 경제시장 하나를 조성한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의 통일도 주변 국가들이 민족주의를 탈피하고 유럽 공동체를 위하는 시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우리나라의 통일도 동아시아권의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협력과 화합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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