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나라 중국. 그 드넓은 땅 동쪽 끝인 동북지역의 작고 작은 마을에 큰 기운이 솟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땅은 청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난 곳이자, 그 아들과 함께 중국 천하를 제패할 꿈을 키운 장소다. 누르하치가 속한 ‘여진족’은 이곳에서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여진은 ‘조선’과도 관련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를 중국 동북 현지  답사를 통해 하나씩 풀어가 보고자 한다.

심양궁성 안에 전시된 청나라 시대 무기(왼쪽). 심양궁성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다. 심양고궁은 청나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천지일보 2018.11.25
심양궁성 안에 전시된 청나라 시대 무기(왼쪽). 심양궁성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다. 심양고궁은 청나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천지일보 2018.11.25

서쪽으로 펼쳐진 궁궐의 모습
대청제국의 세력 확장과 유사
2004년 유네스코에 등재돼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누르하치는 왜 심양을 선택했을까’.

대청제국의 3번째 수도인 심양고궁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허투알라에서 시작된 첫 도성. 1625년 3월에는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대청제국은 심양에서 중국으로 진출하는 힘을 길렀다. 그리고 ‘만주족’이라는 획기적인 민족개념을 형성해 나갔다.

◆궁궐 모습 속 소박함도 담겨

청나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이유에서일까. 오전 10시임에도 심양고궁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북적북적했다. 중국인의 수를 실감하게 할 정도였다.

심양고궁의 정문인 대청문(大淸門)에 들어서자 저 멀리 팔각지붕의 건물이 보였다. 그리고 큼지막한 건물이 서쪽 방향으로 늘어서 있다. 심양고궁은 동로(東路)·중로(中路)·서로(西路)로 나뉘어져 있다.

누르하치 시절 가장 먼저 지은 곳이 동로다. 홍타이지 시절에는 중로, 베이징 천도 후에는 서로가 지어졌다. 서쪽으로 궁이 펼쳐진 것은 대청제국이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된 것과도 유사하다.

청나라의 전투 모습을 담은 그림 ⓒ천지일보 2018.11.25
청나라의 전투 모습을 담은 그림 ⓒ천지일보 2018.11.25

심양고궁은 허투알라성에 비하면 훨씬 궁궐의 모습이 갖춰져 있다. 그러면서도 소박함이 담겼다. 동로에는 누르하치가 세운 최초의 ‘대정전’이 있다. 청의 건국식과 순치제의 즉위식 등 황제가 의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팔각지붕으로 된 정궁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만주족의 특유한 건축 양식이다.청나라의 군사 제도인 팔기(八旗)를 상징하는 건물인 십왕정도 있었다. 팔기제도는 여덟 개의 깃발로 나눈 만주족 군대다.

중로는 홍타이지 시대에 건설됐다. 대표 건물은 ‘숭정전(崇政殿)’이다. 홍타이지가 황제로 등극한 이후 제국의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결정했던 곳이다.

ⓒ천지일보 2018.11.25
ⓒ천지일보 2018.11.25

홍타이지 내외가 거주했던 건물은 ‘청녕궁(淸宁宮)’이다. 청조 초기의 위엄이 담겼다. 당시 선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3층 건물 ‘봉황루(凤凰楼)’는 건물과 화려한 내부 장식이 현재까지 잘 보존돼 있다.

사고 전서를 보관하던 곳이었던 ‘문소각’도 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81년 편찬된 세계 최대의 백과전서다. 다른 궁궐과 달리 전각이 초록색을 띄고 있다.

심양고궁은 청나라 수도의 황궁으로 건립됐으나 3대 황제인 청나라 성종이 북경으로 천도한 후로는 동북지방을 순회할 때 머무르는 장소로 사용된다. 특히 선조인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의식을 할 때 이곳은 자주 사용됐다.

베이징의 고궁과 함께 중국의 2대 궁전으로 꼽히는 선양고궁은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는 선양고궁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심양궁성 안의 다양한 비석을 바라보는 관광객 ⓒ천지일보 2018.11.25
심양궁성 안의 다양한 비석을 바라보는 관광객 ⓒ천지일보 2018.11.25

 

◆심양관과 소현세자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소현세자는 심양에 끌려왔다. 그가 있던 ‘심양관’은 고궁에서 멀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찾아볼 수 없다. 심양관의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현재 유치원 자리였다는 말이 가장 힘을 받고 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신문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화를 알리고자 했으나 조정은 여전히 반청친명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와 대신들의 미움과 견제를 받던 소현 세자는 1645년에 갑자기병이나 사흘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을 두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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