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칠레 산호세 광산의 자정을 막 넘긴 10월 13일 0시 11분, 쌀쌀한 밤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깊은 지하에서 끌어올려진 캡슐에서 31살의 광부 플로렌스 아발로스가 걸어나오는 순간 숨죽이고 지켜보던 관중들의 탄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비바 칠레, 비바, 비바…’. 목 터지게 ‘칠레 만세’를 외치는 이 환희의 순간에 칠레는 하나였다.

현지 생방송을 지켜보는 세계도 하나였다. 세바스티안 피녜리 칠레 대통령은 ‘오늘 밤은 칠레 국민과 세계가 영원히 잊지 못할 멋진 밤’이라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

해피엔딩으로 끝은 났으나 두 번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될 ‘리얼 휴먼 다큐멘터리(Real Human documentary)’였다. 인류 역사상 최장의 지하 매몰사건-.

아발로스가 구출되던 그 순간으로부터 69일 전인 8월 5일 갱도 붕괴로 33인의 광부들이 지하 6백 22미터에 갇혔다. 70만 톤에 달하는 토사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자 이들은 지하 공동(空洞)에 갇혔다. 운 좋게 만난 피난처였다.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두 달하고도 아흐레를 견디어 내고 살아 돌아왔다. 지상에서는 이들이 죽은 줄 알았다. 기적이 아니면 살아 있으리라고 믿을 근거가 없었다.

이들을 찾기 위해 7번이나 탐침 장치를 땅을 뚫고 내려보냈으나 실패했다. 천신만고 8번째 만에 그들의 생존소식이 전해졌다. ‘피난처에 33명이 모두 살아있다’는 쪽지가 탐침 장치에 실려 올라온 것이다. 그것이 매몰 17일 만인 8월 22일이다. 기적이었다.

신선한 공기와 음식이 들어가고 그들의 일거일동과 음성이 비디오로 녹화돼 지상에 올려졌다. 드디어 지상에 있는 가족들과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구조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칠레와 세계가 흥분으로 들썩였다. 칠레는 광산 기술자와 구조 전문가 의료요원 등 2백 50여 명의 구조 인력을 항시 동원해 작업을 서둘렀다. 독일은 최신식 굴착기를 보내고 일본은 특수 제작된 우주복을, 미국은 NASA(항공우주국)를 통해 장기간 폐쇄 공간에 고립된 광부들의 구출에 필요한 과학적 컨설팅을 경쟁적으로 제공하고 나섰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구조 작업이 활기를 띠면서 ‘신의 은총으로 무사히 구출돼 광부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 구출은 기적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칠레와 세계가 손을 맞잡고 이루어낸 사투(死鬪)의 결실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승리다. 광부들은 지상에서 음식이 내려가기 전 17일 동안은 48시간에 한 번씩 두 숟갈의 참치, 우유 반 컵, 비스킷 반 조각을 나눠 먹으며 연명했다. 또 지휘자의 통솔 아래 조직적이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생환의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환은 기적이지만 동시에 그들 스스로 일구어낸 인간 의지의 승리인 것이다. 따라서 모두의 승리다. 이런 숨 막히는 리얼 휴먼 다큐멘터리를 눈뜨고 볼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감격이고 행운이며 축복이 아닐까.

‘불사조’로 이름 붙여진 캡슐에 두 번째 실려 나온 또 다른 한 사람의 불사조 광부는 40살의 마리오 세풀베다, 세 번째 불사조는 52살의 후안 안드레스 이야네, 네 번째는 매몰 광부 중 유일한 이웃 볼리비아 출신의 23살 카를로스 마마니 등이 대략 1시간에 한 명꼴로 차례차례 구출돼 나왔다.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 먼저 나가라고 등을 떠밀고 양보했다.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주었다. 젊고 건강한 사람이 먼저 나온 것은 혹여 구조 과정에서 돌발 사태가 생길 때 그래야 감당이 되기 때문이었다. 작업반장인 54살의 루이스 우르수아는 책임자이기 때문에 맨 꼴찌가 당연하다.

다섯 번째로 구출된 최연소 19살의 지미 산체스는 ‘나는 신과 악마와 함께 있었다. 가장 힘들 때는 여자 친구와의 사이에서 난 딸이 나를 지탱해주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의 세폴베다는 ‘나는 신과 악마 사이에서 싸웠고 결국 신의 손을 잡았다. 신이 우리를 꺼내줄 것으로 믿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약한 인간은 생사의 기로에 처했을 때 신을 찾는다. 또한 혈육에 대한 애정과 무한 책임으로 강해질 수 있다. 이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닐까. 그저 본능으로 지푸라기를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것에 비하랴.

구조 현장에 나타난 뜻밖의 인물은 1879년 칠레와의 전쟁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영토를 잃고 1백 년 넘게 적대감이 이어지는 이웃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었다. 그는 칠레 대통령의 초청 형식으로 볼리비아 출신 광부 마마니의 구출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왔다. 이것이 두 나라 사이의 화해의 계기가 될 것인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모두가 소망하는 것은 산호세 광산의 휴먼 드라마가가 칠레와 볼리비아 관계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전쟁 대신 평화, 증오와 갈등 대신 믿음과 신뢰의 시대를 열어주었으면 하는 것 아닐까.

극한 상황을 이겨낸 휴먼 드라마는 우리에게도 있었다. 1967년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에 16일 동안 갇혀 있다 구출된 당시 36세였던 양창선 씨의 경우와 1995년 무너진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지하에 묻혀 있다 19일 만에 구출된 당시 19살이었던 여성 박승현 씨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들도 산호세 광산의 영웅들처럼 저승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들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휴먼 드라마의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리얼 휴먼 다큐멘터리는 더는 없어야 한다. 산호세 광산의 경우가 마지막이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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