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전남 보성군 동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읍내인 벌교는 유명한 게 많다. 먼저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로 태백산맥 문학관을 비롯해 소설과 관련된 여러 기념물이 널려있다. 벌교읍에서 소하다리, 김범우의 집, 중도방죽 등을 둘러보면 소설 속의 인물들이 마치 살아 있는듯한 착각이 든다.

특산물 꼬막도 빼놓을 수 없다. 쫀득쫀득하고 감칠맛이 일품인 벌교 꼬막은 전국 최고를 자랑한다. 인근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감싸는 벌교 앞바다 여자만의 갯벌은 모래가 섞이지 않는데다 오염되지 않아 꼬막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벌교의 또 다른 명물로는 청호배 배구대회가 손꼽힌다.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예전 주먹으로 한 가락한 벌교출신 인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회가 열릴 때면 남도사람들이 배구를 통해 완력을 자랑하러 모이기 때문에 벌교에서 주먹자랑을 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풀뿌리 배구대회는 전국적인 자랑거리로 내세워도 결코 손색이 없다. 역사도 오래됐고 한국 배구의 풀뿌리 대회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40여 년간 변함없이 열렸다. 대회가 열리는 장소도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무대 중 하나였던 벌교상고 체육관이어서 그 의미가 깊다. 대회 때마다 체육관 안팎의 코트 여러 개를 동시에 사용해 남녀부 경기가 벌어지고 선수 가족 등이 뜨거운 응원전을 펼친다.

매년 늦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교정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벌교 읍내 대부분의 시민들도 큰 관심을 갖는다. 또 대한배구협회의 전 국제심판과 국내심판들이 자원봉사로 직접 호루라기를 불며 동호인 선수들의 경기운영을 도와준다.

1만 5천여 명이 사는 읍내에서 열리는 대회치고는 그 규모가 결코 만만치 않다. 1968년 시작한 이후 매년 열린 이 대회는 올해 청호기 대회에서 청호배 대회로 이름을 바꿔 42회째 대회가 펼쳐졌다. 10월 16, 17일 양일간 전남, 광주, 보성군의 남녀 9인제 동호인 70여 개팀이 참가해 기량을 뽐냈다.

올해도 벌교상고 체육관은 많은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출범 당시에는 벌교 읍내의 조그마한 동네축제였지만 이제는 벌교와 보성군을 넘어 남도의 대표적인 지역 스포츠 축제로 성장했다.

대회명인 청호배는 조영호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체육위원장)의 아호에서 따왔다. 약관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아호를 딴 대회를 만든 그의 열정과 집념은 일반인의 상식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벌교상고 출신으로 학생 때 9인제 배구선수로 활약했으나 170cm의 작은 키 때문에 6인제 선수로 발탁되지 못했던 그는 한양대 재학시절 고향에서 동네 유지의 지원을 받아 배구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풀뿌리 대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영호 교수는 매년 배구대회를 개최해 배구 불모지인 전남지역에 배구붐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모교인 벌교상고 배구팀 창단을 주도, 전국의 강호로 육성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한양대 총학생회 부회장이던 4학년 당시 한양대 배구팀 창단에도 깊숙이 간여했던 그는 강만수 김호철 하종화 김세진 이경수 등 기라성 같은 수많은 한국배구의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했다.

1990년 이후 대한배구협회 전무와 실무 부회장으로 활약하며 한국배구의 국제화와 경기력 강화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개인의 사재를 털어 풀뿌리 대회를 열고 있는 그는 “청호배 대회는 지역인들에게 배구에 대한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다”며 “배구를 통해 지역인들의 화합을 이끌어내면서 저변을 넓혀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필자가 올해 대회를 관심을 갖고 본 것은 현재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배구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남녀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 같이 진출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한 뒤 급전직하한 한국배구는 좀처럼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밑바닥부터 배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지난 수십 년간 모범적으로 대회 운영을 해 온 한국배구의 대표적인 풀뿌리 대회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대한배구협회 차원에서 한 번 모색했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람이다. 풀뿌리 배구대회의 활성화로 한국 배구의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 보자는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