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곰팡이 - 산책시

이문재(1959~  )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겠지요.

 

[시평]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는 그 사실, 또 그 편지를 부치러 가는 그 일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체국으로 가는 그 길은 아름다운 산책길이기도 했다. 우체국에서 부친 편지가 그대에게 도달하는 그 기간까지인 사나흘은 그대에게 가는 혼자만의 길이지만, 마치 사랑의 그 마음이 발효되는, 그 푸릇푸릇한 시간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대에게 편지가 가는 그 시간 내내 그대와 나 사이에는 푸른 강이 흐르는, 그러한 시간이었으리라.  

그대가 나에게서 떠나고 난 뒤에 그대와 나 사이를 푸른 강이 흐르게 했던 그 우체국은 이제는 다시 찾을 일조차도 없는, 그래서 잃어버린 소중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구나. 그리고는 새삼 깨닫게 된다. 우체통이 빨간색으로 만들어진 그 이유를. 빨간색은 경고의 색이 아니던가. 그대와 나 사이,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떠나야 하는, 그런 시간이 있을 것이라는, 그 경고의 색.

세상의 많은 우체국과 우체통. 오늘도 빨간색으로 입 꼭 다물고 그렇게 서 있다. 그대가 떠나고 난 뒤, 아무러한 마음도, 그 어디에고 부칠 수 없게 된 오늘. 우체통은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빨간 그 모습으로 세상의 한 귀퉁이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로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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