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임금을 가장 근거리에서 모셨던 기관이 승정원(承政院)이다.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과 같다. 승정원의 제일 중요 업무는 왕의 교서(敎書)나 전국에서 상달되는 문서들을 관장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 임금의 언행과 궁중의 중요한 이들을 기록했는데 그것이 승정원일기다. 승정원일기는 양이 방대하고 사료적 가치가 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이 일기를 보면 당시 임금을 중심으로 한 일들을 거울처럼 파악할 수 있다. 

세조 때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 발각돼 죽음을 당한 성삼문은 승정원의 예방승지(禮房承旨)였다. 그가 승정원에 근무해 세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사실 성삼문을 중심으로 한 집현전 학사들을 우대했다. 자신에게도 충성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을 시해할 계획을 세운 것을 알고는 분노가 컸다. 성삼문에게는 녹봉도 후하게 줬다. 그런데 성삼문은 세조가 준 곡식을 한 톨도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뒀다는 일화도 전한다. 세조의 국문 현장에서 성삼문은 세조에게 ‘전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 세조는 더욱 화가 치밀어 성삼문을 위시한 역모관련자들을 능지처참한다.  

조선시대 재상의 면면을 보면 대개 승정원 관리를 거쳤다. 세종 때 황희정승도 승지 출신이다. 그가 겨울 어느 날 한 아문(衙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관리가 율무죽 한 그릇을 대접했다. 황희는 죽을 바친 관리를 탄핵해 정배시켰다는 고사가 전한다. 그만큼 청렴을 원칙으로 했다는 증거다. 

중종 때 학자 조광조도 승정원 관리를 거쳤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곧은 정신으로 훈구세력 적폐와 대항하다 역으로 모함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선조시기 당시 국난극복의 중신들로 거명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승정원 관리였다. 율곡 이이나 서애 유성이 그랬고 백사 이항복은 의주 피난의 주역이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가족들을 먼저 살리려고 궁중을 떠나 흩어졌지만 도승지 백사는 달랐다. 가족들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궁중으로 달려가 횃불을 들고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앞을 인도한다. 

전쟁 중에 형이 왜군에 살해당하고 어린 딸이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한성 수복 후 집에 돌아온 후에야 알았다. 도승지라는 권력의 심장부에 있으면서 청렴해 귀양지에서 병사할 때는 장례비조차 마련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승정원 후배 관리들이 대대로 청백리 이항복의 풍모를 흠모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정조의 총애를 받은 것은 그가 승정원에서 임금을 매일 모셨기에 가능했다. 정조는 다산을 가까이 하면서 실학에 눈을 떴다. 다산도 매우 청렴했다.

‘목민심서’라는 불후의 명저를 쓴 정신적 배경은 다산이 공정하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올바른 정치를 하는 데는 다산 같은 측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성들의 삶이 어려우면 임금은 수라를 줄이고 신하들에게 견책(譴責: 꾸짖음)을 주문한다. 조선 효종(孝宗) 재위 중 흉년이 드는 해가 많았다. 그때마다 임금은 여러 차례 자신의 부덕을 견책하라는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  

대통령을 모시는 권력의 중심일수록 투명해야 한다. 특히 매일 쓰는 재용의 경우 더욱 그렇다. 청와대부터 국민 세금을 하늘 같이 생각하고 씀씀이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야 적폐청산을 주도하는 당위성이 산다. 절약과 청렴을 신조로 스스로 몸을 낮추고 처신한 승정원의 신조를 배워야 한다. 

지금도 승정원일기처럼 투명한 청와대 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실패하지 않은 대통령,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청와대가 될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