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일제감정기 당시 신사참배 모습. 국민일보에 실린 오는 28일 열릴 ‘신사참배 80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 광고 포스터. 19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헌납한 ‘조선장로호’. ⓒ천지일보 2018.10.19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일제감정기 당시 신사참배 모습. 국민일보에 실린 오는 28일 열릴 ‘신사참배 80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 광고 포스터. 19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헌납한 ‘조선장로호’. ⓒ천지일보 2018.10.19

오는 28일 ‘신사참배 80년 회개’ 일천만기도대성회

교회언론회 “총회 결의 총회가 풀어 이미 종결됐다”

대성회 준비위 “민족 전체 회개는 한 번도 없었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한국교회가 80년전 천황신에게 참배한 ‘신사참배’ 행위를 회개한다면서 오는 28일 대대적인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다. 준비위인 한국교회일천만기도운동본부는 의미를 다지며 고무된 상태지만 교계에선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나왔다. 해방 후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했고, 회개기도를 했으며 당사자였던 총대들이나 교인이 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지난 15일 논평을 내고 “1954년 안동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39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가결을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이틀에 걸쳐서 신사 참배한 죄악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며 “이로써 총회가 결의한 것을 총회에서 풀었으며, 당시 총대였던 이들이나 교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또한 회개한 것으로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고 회개기도회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지금 우리가 기도할 내용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국가와 북한 인권을 위하여 기도할 때”라고 강조했다.

◆ ‘신사참배’ 오욕의 역사… 그 시작은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제27회 총회를 진행한 1938년 9월 10일, 이날은 한국교회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록됐다. 신사참배를 찬성한다는 ‘긴급 동의안’이 막힘없이 통과됐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지지발언과 동의가 나왔고, 재청도 나왔다. 토론도 의견개진도 없었다. 홍택기 총회장은 “‘가’(可) 하면 ‘예’ 하시오”라고 물었고, 거부의사를 묻는 과정이 생략된채 의사봉이 두들겨졌다. 결의에 항의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 경관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결의는 한국교회에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전체 개신교인 중 약 70%인 28만명의 교인이 예장소속이었다. 감리교, 성결교, 천주교 등 다 신사참배를 찬성했고 마지막 남은 장로교마저 일제에 강압에 못이겨 우상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시 목회자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닌 국가의식이라는 논리로 자기들은 물론, 교인들에게 독려했다. 그러나 국가의식으로만 보기엔 석연찮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이듬해 열린 총회는 예배보다 ‘동방요배’가 먼저였으며, 기미가요와 황국신민 서사를 제창한 후에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가 진행됐다. 설교 후엔 일본군 장병을 위한 묵도가 이어졌다. 사실상 신사참배는 예배의 일환이 됐다. 이 때문에 ‘자발적 결의’라는 지적이 크다. 실제 이후 총회에서는 국방헌금은 물론 일본군 위문금 모금안이 통과됐고, 급기야 1942년 총회에서는 애국기라는 명분으로 ‘조선장로호’라는 전투기가 헌납됐다. 이 전투기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투입됐다.

◆ 해방 후엔 회개 대신 ‘고신파’ 분열

이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곧바로 신사참배 행위를 회개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18일 재건 노회가 열리고 두 개의 자숙안을 정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기성교회 인사들은 주남선 목사 등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감됐다가 출옥한 성도들과 마찰을 빚었다.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출옥 성도들의 비난에 대해 “신사참배는 각 개인의 양심문제로서 각자 충분한 심적 고통을 당했다”며 “이제 해방이 됐다고 해 신사참배자들을 죄인으로 운운하는 것은 비양심적인 행위”라는 논리를 폈다. 결국 1951년 장로교회는 6.25 사변 직후의 총회에서 고신파를 정죄했고, 고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며 분리돼 별도 교단을 꾸렸다.

장로교는 1954년 제39회 총회가 되어서야 자신들이 했던 신사참배 결의를 철회했다. 하지만 개신교 내부적으로 이 철회가 형식적인 선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후 38년 동안 잠잠했던 신사참배 회개 논란은 1992년 한경직 목사가 종교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며 “신사참배를 통해 우상숭배를 한 죄를 회개한다”고 밝히면서부터 다시 고개를 들었다. 2006년 1월에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초대 감독이던 최태용 목사의 친일행각을 고백하고 반성했다. 최 목사는 1942년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신의 뜻이라며 “우리는 신을 섬기듯 일본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7년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가 3.1절을 기념해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고백선언문을 발표했다. 그해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도 정기총회에서 신사참배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2008년 9월 24일 제주에서 열린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장로교 연합감사예배’에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 합신, 기장 총회 총대 3950명과 제주지역 목회자 및 교인 등 모두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한다며 기도했다. 하지만 이 기도회도 각 교단의 공식적인 신사참배 회개 표명은 아니었다. 2015년엔 예장합동 소래노회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다.

◆신사참배 결의 80년 “모두 다 회개해야”

올해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결의를 하고 우상에게 굴복한 역사를 만든 지 80년이 되는 해다. 개신교 내에서는 신사참배 회개 촉구 분위기가 한창이다.

지난 5일 한국교회일천만기도운동본부 대회장 윤보환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한 죄값을 3~4대에 걸쳐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나라는 신사참배를 한 죄를 온전히 회개치 못하고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며 “각 교단에서 국지적으로 회개운동도 일어났고, 회개도 이제 선포했지만 민족 전체가 회개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윤 감독은 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신궁 2개를 만들고 신사 1141개를 만들고, 그리고 각 가정에 신사박스를 나누어줘서 교회에서는 동방요배를 통해서 예배와 혼합시키도록 한 것을 전체적으로 회개하고, 순수복음으로 한국교회가 기도로 거듭나는 기회를 만들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기도회 개최 이유를 밝혔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도 지난달 18일 언론 기고글을 통해 “우리가 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하느냐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며 “그러나 느헤미야도 조상들의 죄를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와 다니엘도 조상들의 죄를 놓고 회개했지 않은가(느 9:1∼2, 렘 14:20, 단 9:16)”라고 말했다. 소 목사는 “개인적으로만 회개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회개운동을 민족적으로 확산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 앞서 민족 전체가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기도회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 한국기독교연합(한기연, 대표회장 이동석 목사),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한기부, 대표회장 윤보환 감독),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대표회장 유중현 목사),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세기총, 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등이 공동주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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