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過猶不及), 공자가 중시 여겼던 사서삼경 중 하나인 ‘중용(中庸)’을 대변하는 가르침이다. 공자와 그 제자 자공의 대화중에 있었던 하나의 일화다. 어느 날 자공은 “스승님, 자장과 자하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묻는데, 공자는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지(부족하지)”라고 하자, 다시 자공은 “그럼 자장이 더 낫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이 때 공자는 “지나침은 차라리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라”라고 대답한다. 즉, 지나침을 경계하라는 의미며, 그 지나침은 오히려 화를 불러온다는 유경(儒經)의 교훈이다.

요즘 이 한반도에는 평화의 무드가 조성돼가고 있다. 모두가 염원해 온 세상이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무드(분위기)일 뿐, 그 어느 것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임에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마치 이루어지는 것같이 또는 이루어진 것같이 예단과 속단의 언행이 지나칠 정도로 난무하다. 자칫 국민들로부터 오해와 오판의 빌미로 이어질 수 있는 정부 발표나 가짜뉴스나 지나치고 정제되지 않은 언론보도는 자제돼야 한다. 또 반대로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도 경계해야 한다. 반대도 분명한 논리와 이유가 수반돼야만 한다.

‘돌다리도 두들기라’는 격언처럼 듣기 싫겠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귀담아 들어야 하며, 듣지 않는다는 것은 평화의 본질도 의미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만다. ‘수신제가’ 되지 못한 평화가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화는 이 같은 이치를 벗어나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평화가 아니었다. 평화는 억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진정한 평화가 목적이라면 반대와 비협조 측에 납득할만한 논리와 답을 가지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자세를 보였을 것이다. 왜? 평화는 반드시 이루어야져야 하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설득 대신 자신들의 정책과 논리에 반하면 평화 반대자로 매도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찬반을 확실하게 나누어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는 일에만 몰두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오늘날의 비극적 현상은 내 편은 네 편과 다른 북한 김정은 정권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으며, 네 편은 그야말로 네 편으로 새로운 적의 개념으로 공론화시켜가고 있다. 그 네 편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으니 그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매사에 신중해야 함에도 지도자들부터 앞장서 마치 북한 김정은 정권이 비핵화와 평화를 선물로 준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국제무대나 적지에서 아부하듯 홍보전을 펼친다면 과유불급과 같은 현자(賢者)들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우매하고 교만한 자들로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특히 작금의 지도자들로부터 나타나는 경솔하기 짝이 없는 언행은 진정한 평화 대신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평화라는 단어를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문 대통령의 유엔 발언으로 ‘김정은 정권의 대변자’라는 미국 메이저 언론의 기사 헤드를 낳게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지도자들은 북한이라는 아직 적지에 불과한 땅에서 적장들과 나누는 대화는 참으로 ‘기고만장’이라는 단어로도 그 무지몽매성을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이해찬 의원은 정부와 여당의 책임자로서 적장들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운운한다는 것은 천지를 분별 못하는 지도자가 틀림없어 보인다. 국내에서야 무슨 생각과 발상과 주장을 못하겠냐마는 그 국보법은 바로 북한정권으로 인해 만들어진 법임에도 그 당사자인 적장들과 폐지 운운한다는 사람을 국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 심각한 것은 잘잘못을 넘어 이런 생각과 발상이 어떤 사상에서 기인됐을까에 대한 의문이며, 나아가 같은 편이라고 무조건 동조만 하는 여당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 정부와 여당 일각에선 김정은 위원장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천재라며 칭송하고 있다는 북한매체의 보도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지나치다.

또 하나의 역사와 문학이 주는 평화에 대한 교훈이 있다. 지중해연안의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고대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을 호머가 기록한 문학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묘사하고 있다. 두 도시국가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 때 그리스는 트로이 성문 앞에 평화의 메신저로 목마를 보냈다. 지리한 전쟁으로 평화가 그리웠던 트로이는 그 평화로 위장된 목마의 함정에 빠져 성문을 열게 되고, 그 목마 속에 숨겨져 들어온 적병에 의해 견고한 성 트로이는 무너지고 만다. 물론 “목마는 위장된 평화며 그 속에 무서운 음모가 있을 것이다”라고 외쳤던 제사장이 있었지만 평화에 목말랐던 트로이는 그 제사장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 결과는 멸망이었다.

그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힌 게 없는 한반도 평화의 진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경거망동(輕擧妄動)이 아니라 진실한 평화를 향한 길을 뚜벅뚜벅 신중하게 그리고 하나 되어 가야 할 것이다.

평화에 목말라하는 우리에게 저들이 보낸 평화라는 선물은 평화를 가장한 트로이 목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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