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시민주권 홍보기획위원장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에는 ‘삼풍동 아파트역’이란 희한한 버스정류장이 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는데 버스 안내방송에서 “다음 정류장은 삼풍동 아파트입니다”라는 멘트가 나왔다. 그 순간 난 어리둥절했다.

“삼풍동 아파트라니? 요즘 아무리 기상천외한 아파트 이름이 속출한다지만 삼풍동 아파트는 처음인데?”
나의 궁금증은 집에 도착해서 인터넷을 뒤져보고서야 풀렸다. 이 버스정류장은 삼익, 풍림, 동아아파트 등 3개의 아파트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데 정류장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3개 아파트 주민들이 서로 자신의 아파트명을 고집하다가 결국 타협책으로 3개 아파트의 앞 글자를 따서 작명키로 했다는 것이다.

비단 삼풍동 아파트뿐만 아니다.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기차, 버스역명은 서로 자신들의 이익을 반영한 이름을 고집하는 ‘지역이기주의’ 때문에 황당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KTX(한국고속철도)의 천안아산역이다. 이 역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에 소재하지만, 철도부지의 약 5% 정도가 인근 천안시 불당동에 걸쳐 있어 처음 착공당시부터 역명을 놓고 분쟁이 있었다.

당초 건설교통부는 이 역이 비록 아산시에 있지만 천안시의 생활권에 속해 이름을 ‘천안역’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아산시가 ‘아산역’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년여 동안 논란이 지속됐다. 천안시에서는 역의 이용객의 상당수가 천안시민인데다 역이 소재한 지역이 천안시 생활권이라며 ‘신천안역’ 명칭을 주장했고, 아산시에서는 역이 아산시에 위치해 있다며 ‘아산역’ 명칭을 요구했다. 결국 2003년 11월 20일 건설교통부가 절충안으로 ‘천안아산’을 역명으로 하고 아산시의 추가 요청을 받아들여 ‘(온양온천)’을 병기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다. 올해 말로 예정된 KTX 2단계 공사 완공을 앞두고 경북 김천시와 구미시 간에도 역명 싸움이 한창이다. 경북 김천시 남면에 들어서는 KTX 중간역사의 이름을 놓고 치열한 쟁투가 벌어지고 있다. 도시 인지도를 고려해 ‘김천구미역’으로 정해야 한다는 구미시에 맞서 김천시는 ‘김천역’이나 ‘신김천역’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곳의 경우 역사는 김천시에 위치해 있지만 인구의 경우 구미시가 40만인데 비해 김천시는 15만에 불과하다. 양 도시는 그간 여론조사 등을 앞세워 수차례 절충을 거듭하다 최근에는 ‘김천구미역’으로 거의 가닥이 잡혀가는 추세다.

역명 대립 분쟁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지하철이 속속 개통되는 과정에서도 빚어졌다. 이 때는 대개 지하철역이 오가는 주변에 위치한 대학들이 역명을 자신의 대학교명으로 지으려고 하는 바람에 분쟁이 불거졌다. 대학들로서는 지하철역 이름에 자신의 대학명을 붙일 경우 엄청난 홍보효과가 있다는 점 때문에 필사적으로 로비를 펼쳤다. 현재 수도권 지하철역에 ‘XX대’ 혹은 ‘XX대 입구’라는 역명이 붙은 것은 모두 이 같은 이력을 지니고 있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하철당국은 이 같은 분란이 잇달자 나중에는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다. 지자체별로 ‘지명위원회’를 구성해 ▲정거장 주변의 옛 지명 또는 법정 및 행정구역 명칭 ▲고적·사적 등 문화재 명칭 ▲국가 주요 공공기관 또는 주요 공공시설 명칭 등을 사용키로 했다. 다만 부득이 특정기관 명칭을 사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역사주변 여건, 역사와의 거리, 시민의 인지도, 시설의 규모, 통행인구 등을 감안하여 정거장 고유명칭 하단에 병기키로 했다. 또한 2기 지하철부터는 대학명을 역명으로 정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역사가 대학 부지내에 위치하거나 대학과 접하여 대표지역명으로 인지 가능한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대학명을 병기키로 했다.

뒤늦게나마 이 정도라도 원칙을 세운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해당지역에 새로 들어선 대학 등 대형건물보다는 원래부터 불리던 그 지역의 우리말 이름을 붙이는 게 훨씬 바람직해 보인다. 서울의 경우 최근 개통된 노선의 경우 ‘애오개’ ‘여의나루’ ‘노들’ ‘마들’ 등 순우리말 역명이 많이 늘어난 것은 만시지탄이다. 그리고 다소 사소하지만 버스역명에도 똑같이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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