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영국의 옥스포드대 의대생 로저 베니스터는 날마다 눈을 감고 상상했다. 4분 안에 1마일(1609m)을 달리는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의 4분벽’을 깨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이라며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는 가능하다고 여겼다. 반복되는 상상과 피나는 훈련을 쌓은 뒤 마침내 기회가 왔다. 1954년 5월 6일, 25세의 베니스터는 질주했다. 트랙을 돌아 마침내 결승선에 들어온 뒤 의식을 잃었다. 드디어 1마일을 3분59초4로 주파했다. 새로운 인간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부터이다. 그의 역사적 기록이 세워진 뒤 한 달 만에 무려 10명의 선수가, 1년 후엔 37명이, 2년 후엔 300명이 4분벽을 돌파한 것이다. 인간이 갑자기 빨라져서 이렇게 됐을까? 그것은 달리기 능력이 개선된 것이라기보다는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여겼던 ‘마음의 장벽’을 베니스터라는 한 선수가 깼기 때문이다.

‘베니스터 효과’ 때문이라고나 할까. 올 들어 미국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코리안 영웅들이 각종 신기록과 진기록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워 코리안 야구가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몇십 년에 한 번 나오기도 어려울 중요한 기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올해 수립된 123, 3, 9, 29라는 숫자를 대면 열혈 국내 야구팬들은 그 기록을 세운 사람의 이름이 누구인지 바로 호명하고 기록의 의미까지 알아낸다. 모두 최근 몇 달 사이에 세워진 중요한 의미를 갖는 프로야구의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미 메이저리그의 ‘코리안 특급’ 박찬호(피츠버그)는 지난 13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서 1이닝 동안 사사구 1개만 허용하며 팀을 승리를 이끌어 통산 123승 97패를 기록했다. 이는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갖고 있던 메이저리그 아시아 최다승과 타이기록을 이룬 것이며 메이저리그 데뷔 17년 만에 거둔 대기록이다. 3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꽃같은 투지를 보이며 불가능할 것 같던 아시아 최다승 기록달성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박찬호의 현 페이스대로라면 새 이정표를 세울 것이 확실해 보인다.

메이저리그 슬러거 추신수(클리블랜드)는 지난 18일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한 경기에서 만루홈런 포함 3개의 홈런을 터뜨리는 불방망이를 과시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추신수는 “아마도 내 생애 최고의 경기가 될 것 같다”며 “이날 경기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 경기에서 홈런 3개를 친 것은 클리블랜드 타자로는 지난 2004년 트래비스 해프너 이후 6년 만의 일이며 올 시즌 메이저리그 타자들 중에서도 12명에 불과하다. 최희섭이 2005년 1경기 3개의 홈런을 친 후 코리안 타자로는 5년만의 일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이 같은 기록을 올리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홈런 기록이라면 한국의 대형타자 이대호(롯데)도 결코 빠질 수 없다. 이대호는 지난 8월 9경기 연속 홈런기록을 세워 이 부문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일본(7경기), 미국(8경기)을 넘어선 그의 홈런 연속기록은 앞으로 당분간 깨지기 힘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괴물 투수’ 류현진(한화)의 대기록도 올해 세워졌다. 류현진은 지난달 26일 넥센전에서 7회 솔로 홈런을 허용, 4점째를 내주고 연속경기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투구, 3자책 이하) 행진기록을 29경기에서 마감했다.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류현진의 퀄리티스타트 행진기록이 깨진 것에 대해 전문가들과 팬들은 상당히 아쉬워한 모습이었다.

올해 유독 많이 세워지는 신기록 러시로 인해 코리안 야구는 세계 속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기세를 보이고 있다. 한 번 기록경쟁에 불이 붙은 선수들은 신기록 경쟁에 뛰어들며 치열하게 승부를 펼치게 되고 코리안 야구는 그 위상을 한껏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난공불락 같던 기록들이 깨어질 때 영웅들의 스토리는 대중매체들에 의해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고 팬들은 기록에 대해 더욱 관심을 모으게 되는 것이 대표적인 기록경기 종목 중의 하나인 프로야구의 특징인 것 같다. 오는 11월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추신수 등이 출전할 한국야구가 또 다른 ‘베니스터 효과’를 이어가며 정상에 도전할 것을 기대해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