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들을 청와대에 불러 모아 대기업과 그 협력업체들의 상생 방안에 관해 얘기를 나눈 것은 아마 초유의 일 같다.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대체로 이런 자리에서 국민 경제 전체의 성과와 효율을 위해 대기업들이 분발하고 노력해줄 것을 당부하는 의례적인 말을 하기 마련이었다.

이처럼 중소 협력업체들을 배려하는 상생 방안만을 주제로 얘기를 한 일은 기억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대기업 총수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할 자신들의 애로나 건의사항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 못했다.

“총수들이 마음먹으면 중소기업과 상생(相生)하나 못 하겠습니까”라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어느 한 사람 감히 딴소리를 할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줄줄이 나름대로 준비해온 상생 방안을 쏟아냈다. 내용 중에는 입에 발린 소리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실천이 뒤따라야 할 대통령과 한 엄중한 약속이다.

대통령과 한 약속이니 말로만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부담을 느끼고 실천하려 고심하고 애쓸 것이라는 피드백(Feedback)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총수의 얘기는 깊이 새겨들을 만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산하 중소기업과의 상생이 왜 중요한지 그 정곡(正鵠)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성찰을 해왔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되지만 멀리 가려면 협력업체와 함께 가야 한다.” 바로 이것 아닌가. 풍부한 인문학적 철학적 소양을 풍기는 스마트(Smart)한 경영관의 피력이었다. 그는 맥(脈)을 정확히 짚었다.

이런 말도 했다. “대기업은 경영 합리화로 이익을 내야지 협력업체를 두드려서 이익을 내서는 안 된다.” 항상 을(乙)의 입장이고 약자인 대기업 협력업체들의 맺힌 응어리와 쌓인 한(恨)을 풀어 주는 얘기 아닌가. 개별 대기업 차원에서 협력업체에 바로 이렇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상생’일 것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사장단 인사에 협력업체를 돕는 실적을 반영하겠다.” ‘그룹’ 내에서 절대적 인사권을 가진 총수가 월급쟁이 전문 경영인 인사에 상생 실적을 반영하겠다니 이보다 더 상생의 ‘실천’과 ‘실효’를 보장할 방안이 또 있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대기업들 모두가 꼭 이렇게만 해준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고 ‘공정한 사회’ 구현에도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총수들이 이러한 공정함과 따뜻함, 명철(明哲)을 지니고 기업 경영을 한다면 협력업체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대기업도 살리고 국민 경제 전체를 이(利)롭게 할 것이 자명하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전해 듣진 못 했지만 내심 크게 감동하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이것이 ‘공정사회’ 구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친서민을 외치고 있는 대통령이 그날 그 자리에서 대기업 총수들에게 주문하고 싶은 말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 정도의 뚝 부러지는 말을 참석자로부터 이끌어 냈다면 그날 대통령이 베푼 청와대 밥값은 부담자(負擔者)인 국민에게 충분히 본전을 뽑아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할 만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빨리 가야 하는 경제 발전 전략’에 의해 대기업을 편중 지원하는 ‘불가피한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해왔다. ‘멀리 가기 위해 중소기업과 함께 가는 균형 발전 전략’, 그러니까 적어도 중소기업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키워 자연스럽게 대기업으로 자라게 하는 원론적이고 정상적인 발전 전략을 처음부터 모색하고 구사해온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소규모 소자본의 약체(弱體) 중소기업들이 겪는 자유 시장경제에서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을 위한 고통은 대기업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누리는 불평등한 정책적 혜택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대기업이 누리는 불평등한 혜택을 능가했거나 중소기업이기에 겪는 가혹한 고통을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든 지금은 우리가 결정적인 한고비를 더 넘고 멀리 가기위해 중소기업과의 상생이 절박한 과제로 등장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을 쥐어짜고 두드리며 이익을 내고 혼자 내달린 불공정 처사에 대한 징벌이나 그늘에서 묵묵히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돼준 중소기업들에 대한 보상 차원이 아니다. 더구나 대기업이 받던 특혜나 정당한 몫을 빼앗아 중소기업으로 옮기자거나 중소기업만을 생각하고 대기업을 관심의 사각지대에 버려두는 새로운 혼란과 불공정을 만들어내자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산업 발전의 첨단화 고도화 유기화(有機化)로 중소기업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업의 신경과 세포를 이루면서 한 몸을 이루는 산업 구조에 편입돼 있다. 이러한 중소기업 없이 대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가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상생하고 약자라서 중소기업에 씌워진 불공정한 관행과 굴레를 벗겨줌으로써 세계 일류 경제 국가를 향해 멀리 중소기업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강한 중소기업을 만들어 세계 어느 ‘레드 오션(Red Ocean)’의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도록 대기업을 강하게 하고 경제 전체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아니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초미의 과제인 한 정략이라 몰아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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