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100년 전 공연된 희곡 무대에 다시 오른다

국립극단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9번째 작품

낯선 이국땅서 시대를 마주한 이들의 이야기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우리나라의 근현대 희곡은 연극성이 뛰어난 인물과 언어, 서사를 갖추고 있어 연극사적·문학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많다. 국립극단은 현 시대에서도 의미 있는 근현대극을 소개하기 위해 2014년부터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국물 있사옵니다’ ‘산허구리’ ‘가족’ 등 현대 관객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우리 희곡을 무대화했다.

국립극단(예술감독 이성열)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9번째 작품 ‘운명’은 이화학당 출신의 신여성이 하와이에 사는 남자와 사진결혼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운명’은 사진결혼의 폐해를 꼬집으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냈다.

‘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조선인들의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됐던 일제강점기.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고자 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노동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하와이로 이주했다. 남성들에 비해 초기 이주 비율이 낮았던 여성들 역시 이후 ‘사진결혼’을 통해 하와이로 건너가는 일이 많아졌고 1910년부터 1924년까지 무려 700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사진만 보고 결혼했다.

이화학당 출신의 ‘박메리’도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양길삼’의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건너간다. 기대와 다른 결혼생활 때문에 매일을 눈물로 지내던 박메리는 잠시 하와이에 들린 옛 애인 ‘이수옥’을 만나게 된다. 박메리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이웃 남자 ‘장한구’는 메리의 남편 양길삼에게 둘의 만남을 알리며 갈등이 시작된다.

주인공 ‘박메리’는 사진결혼 중매로 결혼한다. 중매자에 의하면 결혼하게 될 남자는 훌륭한 인격과 부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하와이에 도착해 마주한 남편은 구두 수선공에 도박과 음주를 즐기며 술주정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이는 당시 하와이의 척박한 노동환경을 견디기 힘들었던 조선인들의 탈선이 있었고, 사진결혼을 통해 하와이로 건너간 여성들이 기대와 달리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던 실제 사연을 담은 부분이다.

‘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이외에도 섬세한 대사를 통해 작품에서 그려지는 이주민 부부들의 갈등은 당대 조선인들의 이주 과정, 종교 생활 등을 보여준다. 특히 ‘사진 신부’들의 실제 목소리를 담은 영상을 활용하는 등 낯선 이국땅에서 시대의 비극적 운명을 마주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현대 무대에 올려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사에서 자주 목격되는 ‘운명’의 작가 윤백남은 연극,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대중문화의 개척자다. 한국 최초의 영화 ‘월하의 맹서’의 극본을 쓰고 연출했으며,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 ‘대도전’을 집필한 바 있다.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신극 초기 작품인 ‘운명’은 쉽고 적당한 분량에 극적 완성도까지 높아 근대 연극사에서 의미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1920년대 쓰이고 1921년 처음 공연된 ‘운명’은 극적 완성도가 뛰어나 발표 이후 대중 극단에서 활발히 공연됐다. 발표 직후에는 대중 극단에서 활발하게 공연됐으나 해방 이후에는 거의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운명’ 스틸. (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근현대극 자문위원인 이상우(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운명’의 뛰어난 연극성은 근현대 연극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에서 아직 크게 재조명되지 않아 국립극단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에 추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00년 역사의 근현대 희곡을 재발견하는 이번 무대는 극단 죽죽의 대표이자 제1회 연강예술상 공연부문 수상자인 김낙형이 연출을 맡는다. 김 연출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작품의 어휘 및 문장을 영상 연출로 풀어내 작품과 객석의 거리 좁히기를 시도한다. 또 양서빈과 홍아론, 이종무 등의 출연진은 탄탄한 호흡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운명’은 오는 9월 7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용산구 청파로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된다.

국립극단은 현대 관객들이 근현대극을 좀 더 쉽게 접하고 이해하도록 15일 오후 3시 공연 종료 후 스튜디오 하나에서 국립극단 이야기마당2 ‘우리연극의 풍경 1920-1930’을 개최한다. 국립극단 근현대극 자문위원과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재석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는 ‘운명’을 포함한 1920~1930년대 연극과 당시 사회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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